재외동포의 역사적 경험과 생활-김우종 구술

사료계열 COH011_13
  • 생산자
    김우종; [류승주; 권오수]
  • 생산기간1
    2014.06.25 ~ 2014.07.01
  • 사료이력
    [산출물]
    DV Tape 21개
    영상 DVD 21장
    구술자별 최종 CD 1장
    녹취록 251매(A4)
    구술시간 18시간54분(1134분)
    기증자료1 115매(A4)
    기증자료2 48매(A4)

    [정리체계]
    이 사료계열에는 구술자별 1개의 사료철이 포함되어 있음
  • 취급인물
    강건(강신태); 강생; 강석숭; 강석주; 강위룡(姜渭龍); 강택민; 곽말약; 교관화(乔冠华 차오관화); 교소광(乔晓光); 교종준(乔宗淮); 金山政英(가네야마 마사히데); 김광협; 김기남; 김대중; 김동삼; 김석필; 김성배(金星培); 김성훈(金成勳); 김영남; 김영삼; 김영주; 김옥순; 김유혁(단국대학교 부총장); 김일; 김일성; 김재철(우사연구회 회장); 김정은; 김정일; 김창만; 김책; 김환; 노무현; 노태우; 노태우; 덜레스; 등소평; 로영순; 류즈단(劉志丹); 리동재; 리민(李敏); 리붕; 리조린(李兆麟); 림춘추; 림표; 림해; 모택동; 박광식; 박근령; 박근혜; 박성철; 박영석; 박영순; 박은식; 박일; 박일파(薄一波: 보이보); 박정희; 박창욱; 박한규(朴翰奎); 박희래(보시라이 薄熙来); 반복생; 배구학; 보로실로프; 상월(尙越); 석동수; 소진광(蕭勁光: 샤오진광); 손중산(손문); 습근평(习近平: 시진핑); 습중훈(習仲勛: 시중쉰); 신영균; 신재부; 안옥준; 안중근; 안춘생; 양계초; 양대초; 양백빙(楊白冰: 양바이빙); 양상곤(杨尚昆: 양상쿤); 양세봉; 양용; 양이진(楊易辰); 양정봉; 양형섭; 여전위; 예지량(倪志亮: 니즈량); 오극렬; 오원근; 오진우; 왕경(왕징); 왕련(王連); 왕명; 왕의(王毅: 왕이); 왕일지(王一知); 왕징; 왕효명; 우천망; 원동근; 유성훈; 유소기; 육정일(陸定一: 루딩이); 윤경빈; 윤상조; 윤정현; 윤주일; 윤치영; 이극농(李克農); 이덕전(李德全: 리더취안); 이동렬; 이동원; 이만섭; 이만열; 이명박; 이명영; 이범오(李范五); 이석주; 이선념(李先念: 리셴녠); 이성무; 이일경(李一卿); 이일망; 이일파; 이현희; 이홍광; 이희호; 장강재; 장개석; 장경국(蔣經國); 장문천(張聞天: 장원톈); 장보고; 장성택; 장태염(章太炎); 장학량; 전기침(錢其琛); 전재석; 정덕재; 정몽규; 정설송; 정옥자; 정율성; 조도원; 조동걸; 조박초(趙朴初: 자오푸추); 조상지; 조성훈; 조영식(趙永植); 조자양(趙紫陽: 자오쯔양); 주덕해; 주리치(朱理治: 주리즈); 주보중; 주은래; 진뢰(陳雷); 진의(陳毅); 차베스; 초도남; 肖塞(쇼사이); 최광; 최도직; 최서면; 최승; 최용건; 최태복; 추안핑(儲安平); 카터; 鐸木昌之(스즈키 쇼지); 팽진; 풍문빈; 풍옥상(馮玉祥); 풍중운; 한광(韓光); 허담; 허정숙; 허형식; 현중극; 호교목(胡喬木: 후챠오무); 호금도; 호승(胡繩); 호요방(胡耀邦: 후야오방); 홍성남; 화국봉(華國鋒: 화궈펑); 和田春樹(와다 하루키); 황상진; 황장엽
  • 관련사건
    6·25전쟁(조선전쟁); 8월 전원회의사건(1956년); 김일성 사망; 김정일 사망; 대약진운동; 동북항일열사 사적조사 사업; 동북항일투쟁사 편찬사업; 동북해방전쟁; 문화대혁명; 반우파투쟁; 보로실로프 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중국 방문(1957년); 세계비정부기구(NGO)한국대회(1999년); 인민공사운동; 정풍운동; 제2차 전국소수민족교육회의(1955년); 제8차 중국공산당 당대표대회; 중국 개혁개방;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주년 경축대회; 카터 전 미국대통령 방북; 코민테른 8월테제; 태평양전쟁; 토지개혁; 한중수교; 해방
  • 주제어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동북항일투쟁사 전적지 답사단(1959년); 동북인민해방군;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목단강 고려경찰대; 목단강 고려인협회(고려인민협회); 목단강 국민고등학교; 목단강시 조선족중학교; 󰡔목단강신보󰡕; 목단강 조선인해방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 목단강 조선인민주연맹;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도령자 자위단; 소련군 위수사령부; 안중근기념사업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선노동당 중앙당학교; 조선신문사; 조선의용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 평양주재 판사처; 중국공산당 동북국 당사연구실; 중국인민지원군; 중국해방전쟁; 중앙교육행정학원; 토지개혁공작단; 팔로군; 하얼빈 안중근연구회; 흑룡강성 교육청; 흑룡강성교육학원; 흑룡강성 당사연구소; 흑룡강성 안중근연구회;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흑룡강신문사
  • 해제
    작업목표

    구술자의 전 생애와 전문분야를 아울러 구술을 진행하며 다음의 사항들에 대한 구술자의 증언을 토대로 해당 주제들에 대한 기존 연구를 보완하고 풍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째, 일제강점기 만주국에서 성장하고 중국의 저명한 역사연구자이자 고위관료로 성장한 구술자의 생애를 통하여 조선족사회가 중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으며,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개개인이 어떻게 중국 사회와 융화하여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해명한다. 구술자 가정이 만주로 이주하고 정착하는 과정, 만주국 일본제국주의의 교육상황, 해방후 만주 지역 조선인들의 활동(교육, 치안, 정치·사회단체), 공산당 정권이 만주에서 수립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건국 초기의 역동적인 중국사회의 움직임, 이후 중국사회의 좌경화, 정풍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소수민족 ‘조선족’이 어떻게 성립되고 어떻게 자기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는가, 중국 지도부는 조선족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펼쳐나갔는가 등은 모두 중국조선족사회 연구의 중요한 테마들이다. 특히 조선족이 중국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중국인이라는 국가주의적 사고 속에서 자기균형을 발견하며 성장해왔던 내면을 포착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은 동북항일연군의 항일무장투쟁이 크게 성장하고 활발히 활동하며 일본제국주의에 타격을 입혔다. 중국 지도부는 1960년대부터 만주 항일무장투쟁사 연구와 기념사업을 중점 프로젝트로 진행하였는데, 구술자는 이 사업의 주축으로서 활동하였고 선구적이며 포괄적인 연구성과를 제출하는 데 주도적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 북한에서 만주항일투쟁 연구가 김일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하면 구술자가 진행한 연구는 만주항일투쟁의 전체상을 해명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그런데 만주항일투쟁은 조선인들이 큰 역할을 담당한 민족통일전선체였다는 점에서 볼 때, 본 구술의 목적은 다만 만주항일투쟁사 연구의 진전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중국에서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북한 중국관계의 굴곡에 따라 이 사업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국가주도 역사연구의 실상과 북한-중국관계, 아울러 중국 조선족의 지위와 실태에 대하여 해명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셋째, 구술자는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로 성장하면서 북한-중국관계를 초기부터 현재까지 직-간접적으로 체험하였다.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는 단단한 혈맹 관계로 해석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중국의 대국주의와 북한의 자주권 옹호의 역사로 설명되기도 한다. 구술자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하여 역사적 진실의 한 단면을 드러냄으로써 북한을 둘러싼 국제관계와 극동아시아 정세 진행에 대한 사실에 근접한 고찰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넷째, 1990년을 전후하여 한국-중국관계가 시작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구술자는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민간교류에서 겪은 구술자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한중관계 역사의 한 축으로서 민간교류의 역사적 진행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는 향후 민간외교의 방향과 전망에 대하여 반성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구술주제

    면담자가 사전에 구술자에게 발송한 질문지는 크게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개인사의 경험으로 출생과 가정상황, 만주 이주와 학창 시절에 대한 주제이다.
    둘째, 구술자의 공직생활로서 교육사업과 당사연구사업을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셋째, 만주국 시기부터 해방,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한국전쟁, 1950년대 후반의 반우파운동 등 극좌적 캠페인들, 1960년대 후반의 문화대혁명 경험, 개혁개방 이후 현재에 이르는 중국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국 당 간부로서 어떠한 체험을 하였는가가 또 하나의 주제이다.
    넷째, 중국과 남북한관계. 북한-중국의 역사적 관계와 현재 북중관계, 한국-중국 교류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였으며, 민간사절로서 구술자의 역할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다섯째, 역사연구자이자 오랜 기간 공직생활을 해 온 구술자의 생애를 볼 때 후대에 어떠한 교훈을 전달하고 싶은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덧붙여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구술자의 관점, 민족사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구술의 주요 내용과 연구사적 의의

    (1) 생애사
    본 구술은 구술자 개인의 생애사를 그 자체로도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데,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생활사, 조선족사회 형성과 발전, 중국현대사 진행과정의 단면들이 그대로 구술자의 생애에 녹아들어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구술자는 어린 시절 중국으로 이주하여 성장하면서 만주국 시기 일본제국주의 교육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마을자치활동, 치안활동에 참여하고, 소학교 교사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과서와 교구를 직접 제작하는 등 노력을 인정받았으며, 흑룡강성 조선족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고 중국정부의 시책에 발맞추어 교육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를 통해 당 간부로 성장하면서 북중관계, 중국 지방정치, 한중관계 발전에도 일정하게 역할하고 많은 체험을 하였다.
    구술자는 본인의 소년-청년기 체험을 회술하면서 1940년대 이후의 중국상황, 즉 2차대전, 소련점령, 해방 직후 목단강 일대의 활기찬 모습들, 내전시기, 건국초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정풍운동, 반우경투쟁,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수습과정 등에 대하여 현장감 있는 증언을 하였다. 이는 중국현대사의 생생한 풍경이자, 잃어버린 민족사의 한 조각으로 재발견되는데, 특히 주목되는 내용들은 아래와 같다.
    각 마을에서 자위단을 만들고 문맹퇴치사업을 진행했다. 사도령자의 상세한 사례를 보여준다. 구술자는 이러한 사업들이 공산당조직과의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사도령자에서 활동을 주도했던 구술자의 백부가 이전부터 항일운동과 연계를 가졌던 점, 고모*들이 항일연군 부대원이었다는 증언, 김광협이 구술자와 한 집안 사람이었다는 증언, 러시아 무기를 보유하였고 팔로군과 함께 토비 토벌에 나섰다는 증언 등을 통해 볼 때, 사도령자의 활동들은 공산당 및 소련군과의 일정한 연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구술자와 추가 인터뷰시 해당 내용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토지개혁에 대하여, 구술자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의 토지개혁은 북한의 토지개혁보다 다소 포괄적인 사회변혁적 양상을 띠었다. 두 나라 모두 토지개혁은 토지의 몰수와 분배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일부 지주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배척에 그치는 광범한 농민운동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출신, 사회성분에 따라 교원 자격이 있는지의 대중적 논의와 공격까지 진행되는 등 보다 철저한 계급투쟁의 양상을 보였음이 구술자의 경험에서 세묘되었다. 구술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실만으로 집요한 공격을 받았으며, 당시 중요한 기층일꾼이었던 지식인, 교사 등이 강경파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였다고 구술자는 회술하였다.
    구술자가 어린 나이에 소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던 일화를 통하여, 중국 공산정권 수립과정의 사회변화와 그에 내포된 소소한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공산정권 수립기 어린 나이의 일꾼이 개별 기초단위에서 상급 간부로 많이 올라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구술자의 회고는 본인이 나이 많은 교사들보다 높은 자리에 임명되면서 스스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다른 교사들도 직위에 맞게 예우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어린 상급자에 대하여 조롱과 무시 등 소극적인 반발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던 풍경이 그려졌다.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은 중국현대사에서 중국지도부가 진행한 중대한 잘못이고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구술자는 반우파투쟁에서 당이 지시하는 ‘우파 적발’에 협력하지 않았고, 그 결과 반우파투쟁 종료 후 동료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구술하면서 이 장면이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목이라는 듯한 감정을 표출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획일적 지도체계 속에서도 묻혀졌던 인간의 생동감을 포착할 수 있게 해 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큰 고초를 겪었음에도 중공당과 지도자 모택동에 대한 신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포착하기도 하였다. 중공당이 많은 착오를 범하던 상황에서도 주은래는 당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큰 존경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2) 북한-중국관계
    구술자가 북한-중국관계의 역사적 진행을 정리한 큰 틀의 내용은 한국 학계에서 정리된 역사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시각은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북한의 처지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술 내용 중 사례와 근거들을 제시할 때에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어, 향후 북한-중국관계를 풍부하게 보완하는 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구술자는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흑룡강성 1등 우수교사’로 표창되고 계속적으로 정력적인 활동으로 인정을 받았다. 구술자는 특히 중국 내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선진인물’로 각종 대회 주석단에 포함되는 등 젊은 나이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많은 학생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측은 이러한 구술자에게 주목하여 특히 북한과 관계된 사업에 구술자를 동원하였고, 구술자는 북한-중국 관계의 실제 진행에 직접 참여해 왔고, 북-중관계 뿐 아니라 북한 내부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구술자의 증언 내용에서 특히 아래의 내용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30년대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역할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구술자는 수치 근거를 제시하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인 공산주의자에 비해 숫자가 훨씬 많았으며, 중국인들이 도시에 근거하였던 데 비하여 조선인은 농촌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의 기층당조직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설명한다. 당시 활동하였던 많은 중국인 공산당원들이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고 중공당에 가입하였다”고 진술하였다는 근거도 제시하였다. 또한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의 항미원조보다 조선의 항일원화가 먼저다”, “동북항일연군은 민족연합군이 아니라 실상 중조연합군이었다”고 발언하였음을 증언하였다.
    또한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까지 중국 동북지역 해방과 공산당의 장악 과정에서 조선인부대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내전상황에서 조선인부대가 크게 공헌하였고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중공 지도부는 조선인부대를 크게 신뢰하였으며, 개별 조선인 중공당원들도 ‘혁명성’이 높다 하여 중대하거나 기밀을 요하는 위치에 주로 배속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중국의 일꾼들이 북에 유입되어 중국과 비난하는 등 북한과 중국간에 미묘한 갈등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구술자는 이에 대하여 북으로 간 핵물리학 과학자들의 사연을 통하여 실상의 일부를 드러내준다. 다만 구술자의 증언에서는 문제가 박성철 외무상 개인의 잘못으로 처리되며, 북한지도부의 정책이라는 사실은 부정된다. 그러나 구술자가 “이러한 사건으로 조선족들이 주요 직위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측의 잘못이다” 라고 구술한 점에서 볼 때, 인재유출이라는 사안이 최소한 중국의 조선족 정책 변화를 이끌어낸 측면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1950년대 말 중국지도부의 캠페인 중 하나로 진행된 ‘민족정풍운동’과 연변자치주장 주덕해의 탈민족적 노선과도 연관이 되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조선족 역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1950년대~1960년대 북중관계가 순조로왔던 시기의 여러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다양한 교류에서 구술자는 중국의 유력한 청년간부이자 조선족이라는 위치 때문에 통역, 번역 등 실무에 관여하며 다양한 사례들을 직접 경험하였다. 중국은 전쟁기 피난민과 고아들을 중국으로 이동하여 교육과 직업훈련을 맡아주었는다. 북한은 이들을 위문하거나 북으로 데려갈 때에 당시 문화선전상이던 허정숙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직접 중국 현지를 방문하여 중국측에 감사를 표하고 아동들을 격려하는 등 전쟁고아의 구제와 중국에 대한 감사 표시에 최대한의 성의를 표하는 모습이 구술되었다. 이는 북한이 항일투사 유가족과 한국전쟁기 군인 유가족들을 배려하고 북한정권의 든든한 지지세력으로 양성하였다는 기존 연구성과를 보충할 수 있는 사례이다. 김석형이 이끄는 북한의 고고학자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과 합작하여 고구려유적 발굴작업을 벌였던 사례는 북한에서의 역사연구, 중국의 고구려사에 대한 태도 등과 맞물려 있는,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다.
    북중관계는 문화혁명 시기에 와서 극도로 첨예한 대립을 겪었다. 그러나 구술자는, 문혁기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에도 중국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절대 중단하지 않고 지속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원조 차량을 보낼 때, 북한을 비난하는 표어를 차에 써서 보내고, 북한이 차량을 돌려보낼 때에도 중국을 비난하는 글을 차에 써붙여 보내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는 내용은 흥미롭다.
    북한과 중국 최고지도부의 관계는, 때로 경색되긴 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틀에서 진행되었음을 구술자는 강조하였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사건’에 개입한 중국이 이듬해부터 정치적 개입에 사과하고, 북한 지도부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하였던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구술자는 1957년 11월 모스크바, 1958년 11월 북경에서의 모택동과 김일성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모택동이 중공당의 북한정치 개입을 사과하고 김일성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기 위해 상당히 애썼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1970년대 김일성이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칭송한 사건,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 북한의 냉담한 대접에 굴욕을 겪은 사건, 1990~2000년대의 양국 지도부의 친선관계와 현재의 상황 등에 대하여 흥미로운 사례들을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중국의 대북한 원조는 북한-중국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다. 북한은 자립경제를 주창하고 대외적 자주를 주창하였으나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계속 받아왔다. 특히 중국의 대북원조는 국가수립기부터 현재까지, 시기에 따라 변화되긴 했지만 지속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그리고 한중수교 등으로 국제정세가 크게 변화하면서 나타난 중국과 북한의 갈등이 원조 문제로 더욱 크게 불거졌다는 사실을 시기별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제분업의 호혜관계로서 이루어졌던 중국의 경제지원이 1990년대를 전후하여 현금거래로 대체된 상황과 이에 대한 북한의 반발은 흥미로운 사례이다. 아울러 원조가 중단되고 북한의 식량난이 가중되던 1990년대 중반, 구술자 본인이 노력하여 북한에 원조를 재개하게 되었다는 증언도 흥미롭다.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는 명목상의 우의와 실리 추구 사이에서 위태롭게 진행되어 왔으나, 구술자의 증언에서 나타나는 상황들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북한과 중국 양국은 서로에 대해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국가관계임을 알 수 있다.

    (3) 당사연구 - 동북항일연군 연구 및 사료집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당사연구”는 “동북지역 반일투쟁사 연구”가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북항일연군 역사 연구이다. 이 분야에 대한 과거 한국에서의 연구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인하여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그나마의 연구도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에 불과하며 민족영웅의 탈을 쓴 “가짜 김일성”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이 분야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현재에는 만주 항일무장투쟁사의 상당 부분이 해명되었다.
    한편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김일성 중심의 ‘조선인민혁명군’의 역사라고 설명하는 편향된 시각을 고수하고 있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 등 국외의 연구성과들을 일정 부분 반영하여 항일무장투쟁사의 폭을 넓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남북한 양국의 역사학계가 ‘만주항일투쟁사’에 대하여 보다 실사구시적인 시각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일차적으로 냉전의 해체와 한국사회의 민주화, 남북관계의 진전 등 국내외 정세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의 선행된 풍부한 조사·연구성과들이 토대를 제공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중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장기간에 걸친 체계적인 조사와 사료수집, 각 방면의 논의를 거쳐 󰡔동북항일연군투쟁사󰡕, 󰡔동북항일열사전󰡕 등의 연구성과를 내놓았고, 이는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구술자는 중국의 항일연군사 조사 연구사업에 시작 단계부터 2000년대까지 참여한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술자는 연구가 시작된 배경, 연구의 진행과 중단, 연구가 재개되어 본격적으로 연구성과들을 출간한 과정, 항일연구사의 주요 쟁점에 대한 격론들에 대하여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1930년대 만주항일투쟁 연구는 이념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이 만주 각 민족의 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운동이었다는 점,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중심으로 수십년 집권하였다는 점, 그러한 김일성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시기에 따라 변화되었다는 사실 등에서 볼 때 그러하다. 이처럼 사안의 정치성 때문에, 중국 지도부에서 이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왔으며, 연구에 참가한 중국 개별 인물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점은 현대 북한-중국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본 구술에 의하면 중국의 만주항일투쟁 연구는 1960년대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1963년 최용건의 중국 방문과 만주지역 답사였다. 1960년대 전반기는 북한과 중국 우호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로 평가되는데, 당시 중국은 소련과의 갈등과 국경분쟁이라는 어려운 국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북한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최용건이 만주를 방문하고 각 지역을 답사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과 조선인의 역할에 대해 주은래와 진의 부총리에게 알려주었고, 주은래가 각지에서 항일투사들을 만나 확인한 결과 동북항일연군과 만주 지역 공산주의운동 발전에서 조선인들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같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모택동에게 전달되었고, 모택동과 교감한 주은래는 북한과 더욱 긴밀한 친선관계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동북 지역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 즉, 중국에서의 만주 항일무장투쟁 연구는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중국 최고지도층의 ‘기념사업’ 결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지도층의 결정에 의하여, 중국 전역에서 모두 폐지된 당사연구소가 흑룡강성에서만은 유일하게 남아 유지되면서 항일투쟁의 기념사업과 조사 연구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구술자는 이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만하고 유능한 조선족”으로 지목되었기에, 교육사업을 접고 당사연구소로 전임하여 역사연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구술자는 당사연구소에 부임한 뒤, 만주 각 지역을 답사하고 중공당 만주성위 자료와 항일연군 사료를 수집, 탈초하고, 항일투사들을 방문하여 증언을 채록하고, 일본, 중국, 북한의 역사문헌을 광범히 번역 참고하여 연구와 기념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구술자의 정력적인 당사연구사업은 시작한지 불과 2년여 만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싸이면서 중단되게 된다. 문화대혁명기 중국에서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에 대해 찬양하는 행위는 “첩자”와 같은 의혹에 따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구술자 역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고 노동현장에 수년간 배치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흑룡강에서의 만주항일투쟁사 연구는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후에 다시 시작되었고, 문혁기 파괴되었던 당사연구소를 차츰 회복하고 조사 연구를 재개하여 1979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연구성과를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흑룡강성에서 구술자가 주도하여 항일투쟁사, 항일열사전 등이 출간되자 이는 길림성과 요녕성 지역의 연구자들을 자극하였고, 이후 연변 지역 조선인연구자들은 조선인의 항일투쟁사 등 민족사 발굴에 활발하게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항일무장투쟁 연구가 정치적 차원에서 결단되고 실행되고, 한편으로 굴곡을 겪어왔다는 사실, 또한 연구편찬의 지도-참여 체계를 증언한 점, 편찬 과정에서 논의된 중요한 쟁점들이 설명되었다는 점 등은 국내에 처음 알려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4) 하얼빈 안중근 기념사업과 연구
    김우종은 안중근을 매개로 한국과의 교류를 시작하여, 하얼빈에서의 안중근 기념사업을 끈기 있게 진행하였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과 시각, 조선족의 호응, 한국 및 북한과의 연계 등으로 인하여 상당히 복잡하며, 조심스럽게 추진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구술자는 복잡한 상황에서도 균형적 시각과 융통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기념사업과 연구 편찬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마침내 2014년 초 하얼빈역사에 안중근의사기념관 설치라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안중근 기념사업은 중국측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관광과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갖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구술자의 증언을 통해서 안중근 기념사업 과정에서 조선족 관련인사들 사이에 또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구술자는 올해 초 하얼빈역사에 설치된 안중근기념관은 양국 정상(박근혜-시진핑)의 약속이라며 기념관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낙관하였다.

    (5) 북한의 역사
    구술자는 본인이 직접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중공당 문헌과 기타 경로를 통해 가진 정보를 토대로 북한 역사 속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꺼내놓기도 하였다.
    북한 ‘만주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광협이 목단강 고려경찰대에서 활동했던 사실은 국내의 연구성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구술자가 집필을 지휘한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4: 결전󰡕 등에 김광협이 목단강에서 류창권, 김동규, 조명선 등과 함께 당조직과 기층정권을 수립하였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목단강 지역은 2차대전 말기 중요 전략거점이자 조선인사회가 크게 형성되고 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데, 소련군사령부가 현지점령정책에서 어떻게 한인을 활용하였으며,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목단강 지역의 새로운 사회조직을 만들어나갔던 모습이 어떠하였는가를 해명하는 데 주목할 만한 소재가 된다. 김광협은 고려경찰대의 성립과 활동을 지도하였는데, 그러한 고려경찰대는 당시 목단강에서 상당한 위력을 가졌음이 증언되었다. 김광협은 이후 북한에 들어와 북한군 형성의 주축이 된다.
    팔로군 포병사령관이었던 무정이 해방직후 목단강에서 목단강 포병퇀을 건설하고 이것이 이후 중공군 포병부대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또한 1950년 12월 숙청된 이후 중국 단동 지역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한국 학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논란이 되어왔던 점들이다.
    아울러 그간 상세히 밝혀지지 않은 김일성의 입북과정의 한 장면도 설명되었다. 구술자에 따르면 김일성은 애초에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군용열차를 이용하여 목단강으로 이동하였고, 거기에서 다시 철로를 이용하여 육로로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목단강 인근 노일령 굴이 폭파되어 철로 이용이 불가능해져 다시 노령으로 이동, 해로를 통해 원산으로 입국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김일성이 목단강 조선인단체의 건설과 방향 제시에 지침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애초 목단강시에 들어온 항일유격대 본대는 목단강시 고려인협회가 개최한 항일연군개선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고려인협회 지도부와 면담한 김일성이 고려인협회를 ‘조선인해방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조직하도록 하였다. 즉 김일성의 지도에 의하여 고려인협회라는, 제각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조직이 좌익적 지향성을 띠는 단체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우종의 이번 구술을 통해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1953년 ‘남로당사건’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 남로당계 인사 중 이승엽과 이강국의 “미국 첩보행위”에 대한 의혹을 새롭게 증언하였다. 구술자에 의하면 제2군단장이었던 무정의 행보, 김일성이 소집하는 최고군사회의 정보가 종종 미군측에 노출되곤 했는데, 북측에서 이를 조사한 결과 이승엽의 지시를 받은 정보유출행위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에는 연안계 일부 인사들에 의하여 김일성 암살이 모의되었는데, 인민군 공군사령관 왕련에게 김일성이 탄 비행기를 격침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는 김일성이 풍중운에게 직접 말한 내용이라고 설명하였다.

    구술자 소개

    구술자(김우종)는 1929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만주국 시기 초등·중등교육을 받았고 해방 이후 목단강 자위대와 소학교에서 근무하며 중국공산당원이 되었다. 이후 흑룡강성 교육사업의 중추 일꾼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3년에는 흑룡강성당위원회 산하 당사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중국공산당사, 특히 동북항일연군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흑룡강성당사연구소 소장에서 퇴직한 후에도 여러 기관의 고문을 맡은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흑룡강성 조선족 중 독보적으로 상급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성장과 활동은 다만 조선족 사회만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중국사회에 철저히 융화되는 속에서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중국사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아울러,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협력하여 하얼빈에서의 안중근 기념사업을 끈기 있게 진행하였는데, 이는 양국관계와 동아시아관계와 관련하여 구술자가 균형적 시각과 행동을 견지하였기에 가능하였고 마침내 2014년 초 하얼빈역사에 안중근의사기념관 설치라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또한 한국의 만주 지역 연구 및 사료조사사업을 위하여 조언하고, 한국 여러 기관과 중국 관계기관의 협정을 위한 다리를 놓아주었으며, 남·북·중국 기타 국가들이 참가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조직 지원하는 등 내실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역사적 역할을 돌이켜볼 때, 본 구술작업은 김우종의 인생 역정을 남기는 것 그 자체로도 사료적 가치가 있다. 구술자의 생애는 그 자체로서 식민지시기 만주 한인이주사, 중국 조선족 교육사, 중국내전·한국전쟁·반우파투쟁·문화대혁명·개혁개방 등 중국현대사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의 한 단면을 해명하고, 중국사회의 격변에서 조선인이 어떠한 경로로 능력을 발휘하며 발전해 왔는가의 한 단면을 구성하는 데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또한 당 고위관료로서 중국-한국관계와 북한-중국관계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언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본 구술작업을 통하여 현대 국제정치의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 열람조건
    목록 공개자료
  • 복제조건
    복제 가능하나 학술적 이용에 한정되며 허락없이 발간 불가 자료
  • 저작권정보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