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민이 겪은 대구 10월사건

사료계열 COH010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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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료철 : 8건
  • 생산자
    강창덕; 김명조; 배일천; 유병화; 이상해; 이수천; 이종만; 최일달; [김상숙; 최충열]
  • 생산기간1
    2013.07.19 ~ 2013.09.28
  • 사료이력
    [산출물]
    DV Tape 22개
    영상 DVD 22장
    구술자별 최종 CD 8장
    녹취록 595매(A4)
    구술시간 21시간16분(1276분)

    [정리체계]
    이 사료계열에는 구술자별 8개의 사료철이 포함되어 있음
  • 취급지명
    대구; 경산; 하양; 영천; 대창면; 칠곡; 동명면; 자양면; 왜관읍; 석전리; 약목면; 화북면; 자천리; 구전리; 영천 뒷고개; 화남면; 월곡리; 용계리; 봉화
  • 취급인물
    강창덕; 조희윤; 정문조; 서상일; 김명조; 한위술; 한석헌; 조규인; 조규선; 조규옥; 배일천; 이만섭; 이원식; 유병화; 김용태; 김회준; 유쾌동; 김일식; 이일재; 이상해; 이백규; 이재관; 정만식; 이수천; 이택정; 이석진; 이규진; 최팔용; 이호익; 정도영; 정기환; 황보집; 황보생; 최일달; 황보선; 이재만
  • 관련사건
    대구10월사건; 구일공(9.10) 사태; 조곡리 학살사건; 9월총파업; 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재소자 학살사건; 자양면 벌바위 학살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학산 학살사건; 자천지서 사건; 열차 탈취 사건
  • 주제어
    미군정; 대구상업학교; 건국동맹; 인민위원회; 치안대; 민학련; 전학련; 민청; 민애청; 혁신정당;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 고문; 농민조합; 남로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면서기; 빨치산; 군경토벌; 민간인학살; 호림부대; 대륜중학교; 동맹휴학; 동명장터; 치안유지대; 서북청년단; 국민보도연맹; 사찰계; 배개발; 양민피학살자유족회; 연좌제; 시신시위; 철도노조; 의무노조; 운수노조; 조선공산당; 정치학교; 공청; 철도노조 중앙회; 철도병원; 철도경찰; 예비검속; 사찰; 너름산; 백골부대; 광주 이씨; 돌밭마을; 고지마을; 주민봉기; 칠곡경찰서; 경찰 살해; 아시골 학살; 지주소작관계; 공개총살; 자천장터; 오리장림; 자천장; 공개총살; 대한청년단; 인민군 패잔병; 파계재; 삐라; 노역
  • 해제
    1. 조사의 목표

    ○ 대구10월사건은 해방 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6년 10월 1일~2일 사이 대구에서 주민 봉기의 형태로 발생해 10월 3일~6일 사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되어 동학농민운동, 3.1운동에 버금갈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났던 해방정국 최대의 사건이다. 또한, 이 사건은 상당수의 농촌지역에서 관련자에 대한 군경의 진압⟶빨치산유격대의 형성⟶군경토벌 등 지역내전으로 이어지면서 제주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기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함께 지역민들의 삶과 한국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 그러나 대구10월사건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부기관의 조사나 학계의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정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2010년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을 조사하여 사건 진상을 일부 규명하고 그간 학계에서 규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일부 새로이 확인하기는 했으나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이 많았다.
    ○ 대구10월사건, 그 후의 지역내전과 민간인희생 사건 등의 진상을 규명하고, 지역민들의 경험을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구술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전쟁보다 몇 년 더 이른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들에 대해 구술할 수 있는 관련자나 목격자는 더욱 고령이므로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구술자를 확보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연로한 구술자들이 소수라도 생존해 있을 때 구술채록 및 연구가 신속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어서 이 조사를 진행했다.


    2. 조사의 과정

    1) 조사의 대상과 범위

    ○ 시간적 범위: 1946년 대구10월사건과 진압과정 등을 중심으로 다루되 사건의 배경과 원인, 사건의 영향과 의미 등을 파악하기 위하여 해방 이후부터 미군정기, 정부수립기, 한국전쟁기까지의 상황을 함께 다루며 필요에 따라 그 이전과 그 이후도 다루었다. 또한 구술자가 사건의 주요 관련자일 경우 구술자의 생애사도 함께 다루었다.
    ○ 공간적 범위: 사건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대구, 칠곡, 영천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 조사 대상: 사건 참여자, 목격자, 청년단원, 피해유족 등 사건이 일어날 당시 다양한 위치와 계층에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했다.
    ○ 구술대상자들은 고령자들이다. 그래서 조사 준비 단계에 대상자로 물색한 사람들이 상당수 사망하거나 노환으로 구술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이 구술 자체가 해방 직후 이념 갈등을 다루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공안정국 이후 자녀들이 증언을 만류한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현지조사를 진행하기 직전에 다수의 예비대상자 중에서 사건 당시 지위와 거주지역 등을 참작하되, 건강상태, 구술동의 여부 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별하여 조사를 진행했다.

    2) 조사방법

    ○ 대면 인터뷰(질의응답식, 녹화와 녹음) ⟶ 녹취록 작성
    ○ 면담 시 조사자 2인이 과업 수행 : 조사의 충실성을 위해 주 조사자 외에 녹화 또는 녹음은 별도의 조사자가 담당했다.
    ○ 면담은 생애사적 내러티브 인터뷰(Biographische Narrative Interview)의 원칙에 의거하여 진행했다.
    ◦ 구술자에게 조사 목적을 설명한 뒤 구술을 요청했다.
    ◦ 구술자가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조사자는 구술자의 구술 과정에 기억을 되살리는 차원에서만 개입하면서 구술을 청취한 뒤 질문지에서 누락된 부분을 추가로 질문하여 답변을 청취했다.
    ◦ 구술내용은 구술자의 허락을 받아 녹음 또는 녹화를 했다.
    ◦ 구술자에게 구술 내용의 공개 여부, 구술내용에 포함된 관계자의 실명 공개 여부를 확인했다.
    ○ 구술시간은 1인당 1회 2시간 정도를 기본으로 진행했다. 단, 구술자의 의사에 따라 그 간격이나 횟수는 조절했다.
    ○ 녹음한 파일은 구술조사의 일반적 방법에 의거하여 녹취 작업을 했다.


    3. 조사 내용

    1) 대구지역

    (1) 기존 연구

    ○ 주요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결정서』, 2010.
    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열음사, 1988.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The Thomas W. Herren papers, 1945-1953, Folder HQ. 6th Division, G-2 Summary of Kyongsang, Kyongsang Communist Uprising of October. 1946, USAMHI. 등
    ○ 기존 연구에 따르면, 대구10월사건은 대구에서 1946년 초부터 있었던 ‘기민시위’와 9월의 노동자 총파업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으며, 1946년 10월 1일 오후 노동자 김용태와 이상익이 대구공회당(대구역 부근) 시위현장에서 사살되면서 10월 2일에는 격렬한 주민봉기와 소요의 형태로 발전했다.
    ○ 이 사건은 대구에서는 1946년 10월 2일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했다. 진압 결과, 당국은 대구10월사건 참여자 중 일부를 체포하거나 사살했다(1946년 11월 13일 현재 대구ㆍ달성지역 민간인 피살자 23명).
    ○ 또한, 대구10월사건 관련자에 대한 토벌은 정부 수립 시기까지도 계속 이어졌는데, 경찰은 이러한 토벌과정에 대구10월사건 관련자 또는 남로당 가입자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고 대구10월사건과 무관한 지역유지와 주민 중 일부를 살해하기도 했다.

    (2) 구술조사 내용

    ○ 이 조사의 구술자는 1946년 대구10월사건 현장을 목격한 노동자가 1명(유병화), 학생이 2명(배일천, 강창덕)이다.
    ○ 사건 당시 철도노조 조직부장이었던 구술자 유병화에 의하면, 대구철도노조는 초대 위원장 김회준을 중심으로 6-7명의 준비위원이 함께 결성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후 대구공회당에서 결성식을 하였고, 구내(운수과) 부서가 주도적이었으며, 전신과 여성 직원들도 참여하였다. 내부에 다양한 서클이 있었고 전국철도노조 중앙회를 결성할 정도로 지역연대활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철도노조, 철도병원, 의무노조, 대구의전이 조직적으로 긴밀한 연관이 있었고, 당시 조선공산당 대구시당과도 연관이 깊었다. 해방 직후에는 대구시당에서 운영하는 정치학교가 있었으며, 김일식, 이선장, 김관제, 이원식, 유쾌동 등이 해방공간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 한편 학생 구술자인 배일천과 강창덕에 의하면, 대구에서는 1946년 10월사건 이전에도 대륜중학교와 대구상업학교 등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연합시위가 잦았다.
    ○ 1946년 10월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학생들이 연합시위를 하며 대구경찰서를 점거하였다. 당시 대륜중학교의 경우 이만섭의 주도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였다.
    ○ 구술자 유병화는 1946년 9월총파업에 이어 일어난 10월 1일과 2일 시위 상황을 목격하고 당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된 노동자가 철도노조원 김용태이며, 그의 시신을 철도병원 의사 서영덕과 김재용 등이 의전(대구의학전문학교)으로 가져가 처리한 뒤 시신시위를 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는 기존 자료에는 시신시위가 대구의전 학생 최무학 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막을 알게 해준다.
    ○ 구술자 유병화에 의하면, 1946년 대구10월사건이 미군에 의해 진압된 후 비합법 국면에서 철도노조, 운수노조 재건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역 단위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 구술자 강창덕에 의하면, 1947년 이후 학생조직은 좌익 민학련과 이철승이 주도하는 우익 전학련으로 나뉘어져 갈등했으며, 이에 의한 테러 사건 등이 빈번했다.
    ○ 아울러 구술자 강창덕은 해방 직후 경산군 하양면 지역의 인민위원회, 민청, 치안대 등 건국운동 상황과 관련 주요 인물에 대해 구술했고, 1946년 대구10월사건 시기 정문조 등 민청이 치안대를 구성하여 하양지서를 점령했다고 구술했다.

    2) 칠곡지역

    (1) 기존 연구

    ○ 주요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결정서』, 2010.
    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열음사, 1988.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The Thomas W. Herren papers, 1945-1953, Folder HQ. 6th Division, G-2 Summary of Kyongsang, Kyongsang Communist Uprising of October. 1946, USAMHI. 등
    ○ 기존 연구에 따르면, 1946년 10월 칠곡에는 1946년 10월 2일 밤 대구에서 온 시위대 40여 명이 신동지서와 지천지서를 습격하여 파괴했으며, 약목에서는 군중 500여 명이 약목지서를 습격하여 3명의 경찰을 살해했다. 군중들은 2일과 3일 사이 밤에 왜관읍 북쪽의 교량 2개를 폭파했으며, 3일 새벽에는 칠곡, 인동, 석적, 북삼지서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경찰ㆍ관리ㆍ부호의 가옥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 군중 측도 7명이 사망했다. 약목에서 출발한 군중들은 중간에 세가 불어나 3일 오전 6시경 왜관에 이르러서는 약 2,000명이 시위행진을 하고 칠곡경찰서를 공격했다. 이 와중에 칠곡경찰서 서장 사택이 파괴되고 서장 장석한 등 6명의 경찰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칠곡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서를 점거했다. 이 봉기와 소요는 10월 3일 성주로부터 왜관에 도착한 충남경찰대가 진압했다.
    ○ 1946년 10월 4일 새벽 칠곡경찰서 부근에서 이수황, 이종학 등 주민들이 충남경찰부대에게 사살되고, 왜관읍 왜관동 주민이 다수 살해되었다. 당시 검거되었던 사건 관련자 중 일부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전쟁기에 학살되었다.

    (2) 구술조사 내용

    ○ 이 조사의 구술자 중 칠곡지역 구술자는 2명(이수천, 배일천)이다. 이 중 1명은 칠곡 왜관지역에서 1946년 10월사건을 목격했고, 1명은 동명면에서 목격했다. 사건 발생 이후 1명은 대한청년단원으로 동원되었고 1명은 사건관련자의 가족으로서 탄압을 받았다.
    ○ 구술자 이수천에 의하면, 1946년 10월 칠곡의 봉기는 약목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주민들은 칠곡 외곽지를 돌아 당시 칠곡 중심가인 왜관읍에 위치한 칠곡경찰서로 몰려가 최팔용을 자체 경찰서장으로 뽑고 경찰서를 점거했다.
    ○ 봉기가 충청도 경찰부대에 의해 진압된 후 사건 관련자들은 팔공산, 유학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유학산의 빨치산 수는 많지 않았다. 홍포수라는 사람이 유명하였다. 빨치산이 활동하던 유학산 인근 마을은 경찰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1949년 또는 1950년에 유학산 벼랑골에서 민간인 학살사건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기에는 인근의 아양골에서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 이수천이 살던 왜관읍 석전리 마을의 상황은 마을 단위에서 1946년 10월사건이 한국전쟁기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석전리는 총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돌밭마을은 반촌마을로 광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이 집안에는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 해방공간에서 활동은 진보적 지식인도 많았다. 이 중 상당수가 1946년 10월사건에 관련된 뒤 한국전쟁 전 또는 한국전쟁기에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고지마을은 소작인들이 살던 각성바지 마을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946년 10월사건에 행동적인 면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한국전쟁 직전 철도노조 관련 사건으로, 한국전쟁 직후 7월 말경 국민보도연맹사건 관련으로 여러 명이 군경에게 강제연행된 뒤 학살되었다.
    ○ 한편 구술자 배일천에 의하면, 칠곡군 동명면은 동명면 치안유지대 지부장인 배개발이 중재하여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문서기록에도 칠곡 전 지역 중 동명면, 가산면만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 그러나 배개발은 이 일로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징역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48년 정부수립 시기에 특사로 출감했으나 지속적으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다가, 한국전쟁기에 대구에서 예비검속되어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
    ○ 구술자 배일천은 4.19 이후에 칠곡지역에서 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려고 시도하다가 5.16 이후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며 평생 연좌제로 고초를 겪었다.

    3) 영천지역

    (1) 기존 연구

    ○ 주요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결정서』, 2010.
    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열음사, 1988.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The Thomas W. Herren papers, 1945-1953, Folder HQ. 6th Division, G-2 Summary of Kyongsang, Kyongsang Communist Uprising of October. 1946, USAMHI. 등
    ○ 기존 연구에 따르면, 영천에서는 1946년 10월 3일 오전 1시경(2~3일 사이의 밤) 수만 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봉기해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출장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40여 명의 경찰이 무장 해제되거나 납치되었으며 관리들도 다수 살해되고, 군수 이태수도 살해되었으며 한민당의 요인이자 영천의 대지주였던 이인석의 집도 공격을 받았다. 특히 영천 북부지역의 경우, 주민 봉기가 화북면 소재지이자 600여 호의 주민이 거주하던 자천리의 장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지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화남면 삼창리(현 화남면 소재지)로 연결되어 일어났다. 이외에도 신녕, 청통, 화북 등 영천의 각 면에서도 봉기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 영천의 봉기는 10월 5일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부대 등 지원경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영천에서는 12월 8일까지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된 사람 가운데 9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 또한, 이 무렵부터 군경의 진압과정에 민간인이 다수 살해되었으며, 이 지역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원이 민간인을 사살하거나 주민들을 집단폭행하는 사건도 자주 있었다. 이에 상당수의 청년들이 입산하여 빨치산유격대를 형성하여 군경과 빨치산의 내전에 버금가는 대치상태가 한국전쟁기까지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도 막심하였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의하면 1946년 10월사건기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영천지역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은 600여 명, 한국전쟁 기간에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으로 학살된 민간인도 600여 명으로 추산된다.

    (2) 구술조사 내용

    ○ 이 조사의 구술자 중 영천지역 구술자는 4명(김명조, 이상해, 이종만, 최일달)이다. 영천 자양면 보현리, 화북면 자천리, 화남면 월곡리, 대창면 강회리 등 영천 남부지역과 북부지역 주민이 골고루 섞여 있다. 1946년 10월사건 당시 면 단위 치안유지대장으로 봉기에 앞장선 사람이 1명, 독립촉성회 청년단 단장으로 우익인사였던 사람이 1명 있다. 그리고 2명은 주민으로서 당시 상황을 목격하였으며, 이 중 한 명은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역에 거주하면서 심부름 등 노역을 한 경험이 있고, 다른 한 명은 청년방위대로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여러 차례 동원되어 길 안내 등의 역할을 한 경험이 있다.
    ○ 구술자들은 1946년 10월사건 당시 화북면의 봉기과정과 자양면의 봉기과정에 대해 구술하였다. 구술자들에 의하면, 해방 직후 영천군 대창면에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치안대(치안유지대) 등의 활동이 활발했고 자양면도 사정이 비슷했다. 당시 영천 군 단위의 주요인물로는 임장춘, 임재식 형제가 있었고 영천 북부지역의 주요인물로는 황보집이, 남부지역의 주요인물로는 조규선, 조규용, 조규인 형제와 한석헌 등이 있었다. 자양면 치안유지대의 경우 20대 초반의 청년 20여 명이 구성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면 단위로 지원을 받았다.
    ○ 1946년 10월사건이 날 무렵 대창면에서는 한석헌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대창지서를 점령하였다. 자양면도 사정이 비슷하였다. 영천 북부지역의 경우 영천 북부지역의 중심지인 화북면 자천리 자천장터에 영천읍의 상인들이 트럭을 타고 들어와 선동하였으며, 이에 그 지역 농민들이 합세하여 ‘몽둥이패’가 되어 마을 단위로 돌아다니며 우익인사, 지주, 친일파 집에 불을 지르거나 가옥 파괴를 하였다. 또한 구술자 최일달은 자신이 거주하는 산간마을 지역까지 시위대가 와서 봉기를 선동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 주민봉기는 일어난 뒤 3일에서 1주일 사이에 외지에서 온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후 군경과 빨치산의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빨치산들은 봉홧불 올리기, 삐라 뿌리기, 길 끊기, 열차 탈취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경북도당유격대와의 연계가 활발했다. 구술자 최일달은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봉홧불 올리기 등에 동원되었다. 반면 구술자 이종만은 군경작전 시 현지 청년단원으로서 자주 동원되었다.
    ○ 구술자 이종만은 회북면의 독촉 청년회장 정기환 암살 등 지역 내부에 남로당원들이 활동하다가 나중에 군경에게 체포되어 총살된 과정을 증언하였다. 구술자 김명조는 영천 남부지역인 대창면에서 호림부대의 횡포와 1949년 영천 남부지역에서 빨치산유격대에 의해 일어난 속칭 ‘9.10(구일공)사태’와 그에 이어서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조곡리 학살사건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였다. 공개총살은 구술자 대부분이 목격하였다. 김명조는 운천동 동장 정동필 공개 총살사건을, 이종만과 최일달은 구전리 황보생, 황보범의 공개 총살사건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 이러한 학살은 한국전쟁기에도 이어졌는데, 구술자 이상해는 영천군 자양면 벌바위 학살사건과 자양면 국민보도연맹 대표 이재관 학살사건 등에 대해, 구술자 최일달은 1951년 2월 인민군 패잔병들의 자천지서 학살사건에 대해 구술하였다.


    3. 조사의 의의

    ○ 이 조사에는 1922년생에서 1932년생에 이르기까지 사건 당시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위치에 있던 구술자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90대 이상 고령자가 상당수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구술자들이 1946년 10월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으며, 일부 구술자는 주도세력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사건 후에는 활동가, 피해유족, 청년단원, 면서기 등의 직업에 종사하며 다양한 위치에서 한국전쟁 시기까지의 상황을 경험하였다. 이들의 구술을 통해 문서자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지역민의 입장에서 겪은 역사적 사건들의 내막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다.
    ○ 구술자들은 칠곡, 영천, 경산 등 자신들의 거주하던 지역의 일제강점기 상황과 해방 당시 상황, 건국운동의 과정과 마을의 좌우익 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구술하였다. 또한, 대구지역의 경우 철도노조와 대구상업학교, 대륜중학교 등의 상황을 통해 당시 노동자조직과 학생조직의 상황 및 당시 활동하던 주요인물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 구술자들은 1946년 10월사건이 발생한 후 미군과 한국 군경에 의한 사건 진압과정과 민간인 피해상황, 빨치산의 형성과 군경의 대치상황 등을 구술하였다. 특히 빨치산의 생활상, 군경의 빨치산 토벌 및 민간인 학살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특히 구술자들은 이처럼 ‘낮에는 군경, 밤에는 빨치산’이라는 좌우 이중권력이 지배하던 시기에 말단 주민으로서 좌우 양 측에 동원되기도 하고, 지역 유력인사이면서 양쪽 권력에 협력하거나 어느 한편에 서지 못하는 제3자의 상태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위치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면서 강제성과 자발성이 혼합된 모순된 정체성을 지닌 채 순응과 저항,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며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지역민들의 상황에 대하여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이러한 구술자료를 활용하여 당시 다양한 위치에 있던 마을 구성원의 입장에서 그 내부에 존재하는 위계성, 다양성과 다중성, 역할 갈등과 모순에 주목하는 후속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 구술자 대부분은 1946년 10월사건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과 연결되었음을 증언하였다. 이런 증언은 마을 단위의 여러 사회적 요인(계급/신분/혈연 등)과 10월사건의 관계, 그리고 한국전쟁기 피해상황과의 관계에 대해 미시적, 심층적으로 연구할 때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구술자는 이러한 피해가 전후 연좌제와 고문ㆍ사찰 피해, 피학살자유족회운동의 탄압으로까지 이어졌음을 증언하였다. 이런 증언을 통해 1946년 10월사건이 전후 한국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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