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통제 : 미국 국제개발처 자료로 본 가족계획사업
인구 통제 : 미국 국제개발처 자료로 본 가족계획사업
1. 들어가며
1960년대 한국사회는 전후복구와 냉전의 지속, 남북 체제경쟁의 조건 속에서 정부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 정책은 경제성장을 향한 물적 조건의 통제, 집중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구’는 경제개발의 성과를 앞당기기 위해서, 또는 경제개발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서 조절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포착되었다. 인구는 인적 자원의 이름으로 관리되었고 농업생산량, 실업률, 저임 노동자의 등장 등 경제성장의 중요한 변수이자 수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경제성장을 위한 인구통제 즉 초산연령, 자녀의 수, 출산간격, 출산시기, 단산연령 등을 계획적으로 조절한다는 믿음은 한국 정부만 갖고 있지 않았다. 1910년대 미국에서는 빈민가 여성을 대상으로 산아제한(birth control) 개념이 등장하였고, 영국에서도 1939년부터 가족계획(Family Planning)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제3세계 탈식민 국가에서 인구 급증이 사회문제, 경제문제로 대두되자 서구에서 창안된 가족계획은 일국 차원의 지식을 넘어 각 진영 내에서 모성-인구를 관리하는 개념으로 확산되었다.
2. 한국의 가족계획사업과 인구 통제
1960년대 초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6.3 정도였으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된 이래 1983년에는 2.06을 기록해 인구 대체수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가족계획은 공식문헌 및 국제기구 담당자들의 비공식 기록에서도 “유례가 없는”,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후반 종료되기까지 25년간 지속되었던 한국의 가족계획사업은 한국 산업화 역사의 한 단면이며 동시에 한국 여성의 신체와 가족 모델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각종 보고서, 책자, 학교교육은 물론 『대한뉴스』 등의 영상매체, 영화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다산(多産)을 부정적 미래로 그려냈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정세력은 조국근대화를 앞세워 한국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키고자했다. 정부에 의해 조직되었던 재건국민운동은 ‘혁명이념의 범국민적 구현’, 일상생활의 습속과 태도를 근대화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1년 6월 가족계획을 운동 목표로, 7월에는 운동 실천사항에 포함시켰다. 동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가족계획을 본격적으로 국책 사업화하였다. 12월 박정희 국가재건최호의 의장은 가족계획사업의 지원을 골자로 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전국 29,000명의 국민운동 요원이 가족계획 특별교육을 받고, 각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가족계획사업의 국책화에 앞장섰던 양재모 연세대 의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자면 1년에 1억원을 가족계획사업에 투자하면 출생률을 10%씩 감소시킬 수 있고, 이는 10년 후에 100배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본다고 했다. 즉, 인구 통제를 국가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접근한 것이다.
한편 가족계획사업은 미국의 제3세계 냉전전략의 일환으로도 등장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군사원조 프로그램을 검토했던 <드레이퍼위원회>는 제3세계 인구증가가 경제성장으로 집중되어야 할 자원을 분산시키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공산주의 침투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인식했다. 1960년대 등장한 케네디 정부는 보다 본격적으로 ‘발전을 통한 안보’ 노선을 천명하고, 제3세계 근대화 전략을 대외정책으로 도입하였다. 1960년대 전반기까지 대한원조에서 군사원조는 크게 축소되지 않았지만 국제개발처(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를 중심으로 경제원조, 일부 기술원조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 정부는 민간 기구였던 미국인구협회와 함께 제3세계 인구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의 정부 주도 가족계획사업을 지지했던 보건관료, 의사들은 대부분 미국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등이 지원했던 인구관련 연구소, 미국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을 가졌다.
1961년 4월 국제 인구 통제기관인 <국제가족계획연맹(IPPF, 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의 지원 하에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조직되었다. 정부는 가족계획사업을 직접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세 번째로 정부 주도 가족계획사업을 시행하는 국가였다. 보건사회부는 전국 1백 개 시군구 기존 보건소에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하였고, 보건소마다 간호원 또는 조산원 자격증 소지자를 훈련시켜 가족계획 지도원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보건사회부 내에 모자보건과를 설치, 정책심의기구로 인구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외국원조로 조직된 <대한가족계획협회>는 반관반민 조직으로서 가족계획사업의 준집행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1968년 <대한가족계획협회>는 먹는 피임약의 지역 보급망을 만든다는 목적 하에 USAID 자금 280,000달러를 미국인구협회를 통하여 지원받았다. 당시 피임시술인 리페스 루프의 부작용이 심각하였고, 먹는 피임약으로 가족계획사업이 변경되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가족계획어머니회>를 조직하였다. 각 지역에서 139명의 간사를 선발하여 2주간 합숙훈련을 진행했고, 이들은 전국 법정 리, 동 중 99%에 해당하는 16,923개 마을에서 어머니회 조직을 완료했다. 어머니회 회원은 초창기 19만 여명에서 10년 만에 74만 여명으로 증가하여 실제 각 마을에서 가족계획 요원과 함께 가족계획사업의 수행자 역할을 자임했다.
1960년대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은 대부분 외국원조에 기대어 집행되었다. 1980년에 가서야 국내 자원의 비중이 이를 넘어섰다. 한국 가족계획사업의 외국원조는 1968년 일시적으로 감소하였다. 인구통제가 일부 국가의 사례를 넘어 전세계 정치문제로 부상하며 미국 및 유엔에서 제3세계 인구통제 활동 개입을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엔인구활동기금(UNFPA)이 조직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가족계획 대상국이 늘어나며 한국으로 원조액이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원조감소는 1972년부터 해결되기 시작했다. USAID 지원 양곡대금 이자에서 지원된 융특지원금, 1976년부터 국제식량기구(FAO) 원조금 등이 새로 투입되었고, 기존의 미국인구협회, 아시아재단 등의 지원은 1975년에 중단되었지만 UNFPA가 새로운 외국원조 자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족계획사업은 시기마다 “알맞은 자녀 운동기(1961-65), 세자녀 운동기(1966-70), 두자녀 운동기(1971-75), 가족계획 생활화기(1976-82), 한자녀 운동기(1983-)” 등으로 변화했지만 기본적으로 인구 억제에 초점을 맞췄다. 1960년대 대표 표어는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기르자”, 1970년대 대표 표어는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 “하루앞선 가족계획, 십년앞선 생활계획”이었다. 가족계획사업은 국가가 가족을 통치 대상으로 설정하고, 여성의 신체와 인구를 경제발전의 하위 영역으로 배치했다는 한계를 갖지만 당대 여성들의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부터 여성들은 출산율을 낮추고자 했고, 그 기반에는 출산과 양육의 고통 뿐 아니라 적은 자원을 소수 자녀에게 집중하여 가족의 계층상승을 추구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남아선호사상에 기초한 다산(多産)을 거부할 때에 국가의 권위를 빌리곤 했다. 국가에서 유포했던 조국근대화, 가족계획 담론을 가정 내에서 밀어 붙이며 출산 중단, 피임 등을 주장했다. 이는 가부장제에 맞서 국가주의를 활용한 사례로도 볼 수 있다.
3. 수집사료 소개
1) 1967년 11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가족계획사업 사진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연도(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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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56_09_00C0278 | INFI-5 Family Planning-Photographs FY67 |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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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미 국제개발처 문서군인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에 속한 사료철로 1967년 11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에서 시행된 가족계획사업의 사진을 담고 있다. 보건사회부는 1967년 무의면 일소와 보건망 강화를 목적으로 전국 1,334개 읍면 보건지소를 설치하기로 방침을 세웠는데 새로 건립되는 보건소지소에는 의사 1명, 가족계획요원 1명, 결핵요원 1명을 배치하고, 152개 읍면에는 추가로 조사원 1명까지 배치하기로 했다. 정부 행정력에 기초하여 확장된 보건지소는 각 지역에서 가족계획상담소, 모자보건상담소를 병설하여 가족계획을 마을 단위로 확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7년 11월 29일 경기도 가평군 방일리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 간부 및 가평보건소 가족계획 담당자들이 이동진료차(mobile clinic)를 타고 방문하였다. 사진자료에 등장하는 하얗게 도색된 이동진료차는 1966년 USAID 자금으로 제공된 10대의 미군 차량을 개조한 것이다. 10대의 이동진료차는 각 지역을 담당했으며 이 자료에 등장하는 이동진료차는 경기도 담당 차량이었다. 이 자료에서 등장하는 가족계획사업은 ‘루프시술’이다. 마을 여성들은 이동진료차 앞에 줄을 서서 루프시술을 받았고, 사진 캡션에서 방일리 이장이 가족계획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 루프시술은 여성의 자궁 내에 T자형 피임기구를 설치하여 수정란 착상을 막는 피임방법이었는데, 마취 없이 간단하게 시행할 수 있었으므로 1960년대 가족계획사업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루프시술은 염증, 출혈, 골반염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가족계획사업의 주 대상이 되는 여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대한가족계획협회는 1968년부터 먹는 피임약을 보급하는 방법으로 산아제한 방식을 변화시켰다. 이 자료에서 인상적인 것은 미국인의 시선에서 방일리 마을을 관찰하고 촬영하여 캡션 설명을 덧붙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1960년대 한국 농촌의 초가지붕, 김치 장독대, 전통 생선식품 등을 인상적이었다고 적었다. 또한 방일리에 함께 방문했던 한국 측 가족계획 전문가 및 요원들의 이름, 직책, 역할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날 방일리를 방문한 한국인은 이종희(보건소 가족계획 고문), 류동준(가평보건소장), 김낭자, 김수경, 신영애, 최선희 등 가족계획 지도원 겸 간호사, 이여옥(대한가족계획협회 지도원 훈련원), 김만호(보건교육 전문가) 등이었다. 방일리를 방문한 후에 가평군 보건소를 찾아 촬영을 이어나갔는데, 가평군보건소 정문에는 ‘가족계획상담소’, ‘모자보건상담소’ 현판이 함께 붙어있다. 이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보건지소 확산 설치와 이에 따른 가족계획 보급 전략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
2) 어느 마을에서 가족계획요원이 여성들에게 산아제한 방법을 가르치는 사진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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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56_05_00V0000_004 | Family Planning; Korean Woman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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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미 국제개발처 문서군인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에 속한 사료철로 마을에서 가족계획요원이 여성들에게 산아제한 방법을 가르치는 사진을 담고 있다. 한국 가족계획사업은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일로 간주하고 사업 시행도 여성이 담당할 것을 정했지만 여성 수행자들은 사업의 목표, 방법,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정부 고위관료와 의료계 전문가들이 가족계획사업의 정책을 수립하고, 여성은 지역에서 가족계획요원으로 사업 수행 역할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962년부터 보건소에 배치된 가족계획 지도원은 조산사, 간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시험과 교육을 거쳐 임명되는 공무원 신분이었다. 지도원은 전문성 및 공무원 자격을 갖춘 직업인으로서 언론에서 회자되었다. 앞의 자료(INFI-5 Family Planning-Photographs FY67)에 등장한 이여옥(대한가족계획협회 지도원 훈련원)은 이러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여옥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보건교육을 전공하였으며 국내로 돌아와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지도원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도원의 훈련자로서 현장을 누비다가 추후에는 가족계획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한편 읍면 단위의 가족계획 계몽원은 평균 학력 중졸 정도의 젊은 여성이 많았다. 이들은 대한가족계획협회의 기초 교육을 수료한 사업의 하급 수행자였다. 가족계획사업은 초창기에 각 마을에서 “아이를 못 낳게 한다”는 반감에 시달려야 했는데 가족계획 정보를 직접 마을에서 전달해야 하는 계몽원들은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근무 의사, 보건소 지도원에 비하여 현장의 반감에 직접 노출되어야 했다. 이처럼 가족계획 지도원 및 계몽원은 마을에서 ‘해괴망칙한 말세의 여자들’로 불려야 했고, 동시에 위로부터 할당된 목표량을 행정 말단에서 처리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
3) 1966~1967년 가족계획 관련 출판물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연도(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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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56_09_00C0276 | INF 7-2; Family Planning-Publication; FY 1964-1967 |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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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미 국제개발처 문서군인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에 속한 사료철로 1966~67년 한국에서 생산된 지역별 가족계획 문건, 국제가족계획 프로그램에서 한국 인구위원회 대표를 맡았던 파울 하트만(Paul Hartman)의 발언, 대한교통의학협회, 공보실 및 USOM 등에서 발행한 각종 위생, 보건, 가족 팜플렛을 모아놓았다. 여기에서는 1966년 발행된 전라남도 ‘가족계획의 달 사업계획’과 한국 인구위원회대표 파울 하트만의 발언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1966년 전라남도는 10월 가족계획의 달을 맞이하여 도, 시, 군, 읍, 면, 동에서 실시했던 사업들을 총망라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사업은 크게 ①가족계획 교육 및 계몽, ②각급추진체 운영, ③학습반 활동, ④각종 업체계몽활동, ⑤가족계획계몽, ⑥모자보건계몽 및 상담, ⑦시술자협의체 육성 활동, ⑧가임자 판단, ⑨대상자 명단 정리, ⑩사후 관리, ⑪도서지역 평가조사, ⑫피임기구 공급, ⑬정관절제수술, ⑭루프피임 시술, ⑮이동시술지도반 시범시술 실시 등으로 나눠 계획 및 실시 결과를 정리하였다. 인상적인 것은 여성 대상의 루프시술, 남성 대상의 정관 수술의 비율이 지역마다 작게는 4배, 많게는 6배 이상 차이가 났다. 이는 가족계획사업의 주 대상이 남성이라기보다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가족계획의 달 현수막 및 입간판 문구와 시안까지 마련하여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전라남도 사례로 국한되지 않고 1960년대 중반 행정력을 활용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국책사업으로서 가족계획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국제가족계획회의에서 한국인구위원회 대표로 연설한 파울 하트만의 원고를 살펴보자. 하트만은 미국인구협회 한국주재대표 겸 보건사회부 가족계획 고문관으로 1963년 내한하여 한국 정부의 초창기 가족계획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1968년 서울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먼저 하트만은 본 회의에서 한국의 가족계획사업은 정부 주도 사업이기에 각 부처별로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대한가족계획협회 등 민간 영역의 지원도 활발하기 때문에 매우 긍정적이라 평가하였다. 이후 한국 가족계획사업의 성과를 보다 구체적으로 ①대중매체를 통한 홍보, ②보건사회부 및 보건소를 통한 공식적인 회합, ③어머니날, 어린이날 등의 특수한 행사 등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가족계획 현장 요원들의 성과에 주목했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모든 현장 요원은 교사와 홍보 담당자라는 ‘두개의 모자’를 쓴다. 왜냐하면 한국 정부에서 가족계획 관련 공보 담당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하트만은 현장 요원들의 열성적인 활동과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루프에 대해 물어 보세요”(Ask about the Loop) 캠페인을 소개하였다. 이 캠페인은 루프 시술이 경제적(Economical)이고, 믿을 수 있고(Reliable), 단순하고(Simple), 효과적(Effective)이라는 포인트를 설정하며 전개되었다. 이 자료를 통해 1960년대 한국 가족계획사업에 깊숙이 개입했던 외국 원조기관 담당자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은 미국인구협회 등 원조기관을 통하여 제3세계 인구통제에 나섰는데, 이는 인구 급증이 경제적 궁핍으로 이어져 공산주의 침투의 조건이 될 것이라 전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계획을 담당한 외국인 고문 입장에서 국가주도형 가족계획사업은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긍정적 요소로 평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루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의 신체적 고통 또는 불안감은 은폐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 |
4) 1971~1974년 미국 국제개발처 프로젝트 예산제출안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연도(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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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56_01_00C0114 | IPS #12 / Project Budget Submission, FY 1971-1974 | 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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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미 국제개발처 문서군인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에 속한 사료철로 국제개발처(USAID) 1971년 회계연도의 프로젝트 예산제출안 부록, 1974년 회계연도의 현장 예산제출안(Field Budget Submission)을 담고 있다. 특히 1974년 현장 예산제출안은 미 원조기관의 현장 활동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세 가지 영역 즉 ①농업, ②가족계획, ③교육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그 중에서 ‘가족계획’을 살펴 본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1974년 한국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목표로 제시되었던 ‘균형 잡힌 경제성장’, ‘농촌 및 사회개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에 발맞춰 원조기관의 활동을 농업, 가족계획, 교육으로 설정하였다. 한편 한국 사회의 안정화를 위해서 가능한 한국 정부가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갖도록 변화시켜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재원이 사라져 국제개발처 및 한국 정부의 5개년계획에서 제시된 사회개발이 좌초될 것이라 전망한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한국의 가족계획사업이 1962년 인구증가율 3%대에서 1973년 1.5%대로 감소시킨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73년에 이어 74년에도 가족계획 전문가 및 연구자 육성에 재정을 투여한다고 계획하였다. 동시에 한국의 성공적인 가족계획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 마련할 수 있는 재원들을 고민하였다. 직접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다른 한편 스웨덴 국제개발처(SIDA), 국제가족계획연맹(IPPF), 유엔인구활동기금(UNFPA) 등에서 지원받은 재정과 앞으로 기대치를 전망하였다. 이 문서는 1960년대 후반 일시적으로 감소했던 대외 가족계획 원조가 다시 증가했던 1972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동시에 미국 국제개발처는 대외 원조를 지속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재정 투여 확장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80년을 기점으로 가족계획사업에 투여된 국내 투자 비율이 국외 투자 비율을 상회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
4. 한국 가족계획 사업 관련 수집사료 현황 및 이력
한국 가족계획사업에 관한 자료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문서군인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된 이 자료들은 한국 정부의 국책 사업화와 미국인구협회 등의 해외 지원이 결합되었던 1960년대를 중심으로 일부 1970년대 자료를 포함한다.
RG 286 문서군 중 “Photographs from the Country Files, ca. 1961 - ca. 2002 [286-CF]” (사료계열 AUS056_04)에서는 미국 가족계획 원조 담당자들이 촬영한 한국 가족계획사업의 현장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RG 286 문서군 중 “Central Subject Files [Entry P 583]” (사료계열 AUS056_09)에서는 각 회계연도별로 국제개발처가 수발신했던 서한, 보고서 등을 확인할 수 있고, “Subject Files, 1956 - 1975 [Entry A1 31]” (사료계열 AUS056_01)에서는 회계연도별 사회개발 프로그램과 가족계획 사업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상기 사료계열 및 사료철은 미국 국제개발처의 대한 원조의 분야 및 인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데, 특히 가족계획사업은 미 원조기관과 민간기관, 보건사회부의 협력 체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제공한다. 또한 한국 가족계획사업은 ‘경제성장’, ‘사회안정’을 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사회개발의 측면에서 보건・위생・의료 관련 문서철, 문서군에 가족계획 관련 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은 한국 가족계획사업 관련하여 미국 수집 자료 뿐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된 지역사 및 구술사 자료를 제공한다. 경기인천 3건, 충북 5건, 전북 1건, 광주전남 6건, 부산울산경남 4건, 대구경북 5건, 강원 6건의 지역사 자료가 존재하며, “조산사의 체험과 출산문화 – 1950~1990년대 광주전남 조산사” (사료계열 COH013_11), “가족계획정책의 수립과 시행(1), (2)” (사료계열 COH005_04)의 구술 자료를 제공한다.
1962년부터 20여 년간 국가 및 해외 원조기관, 민간단체 협업 속에 전개되었던 가족계획사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국 수집 자료를, 같은 기간 민간단체 또는 관련 종사자의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역사 및 구술사 자료를 확인하여 균형 잡힌 시대상을 그려낼 수 있다.
5. 한국 가족계획사업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사료 목록
1)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 (사료군 AUS056), Photographs from the Country Files, ca. 1961 - ca. 2002 [286-CF] (사료계열 AUS056_04)
2)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 (사료군 AUS056), Central Subject Files [Entry P 583] (사료계열 AUS056_09)
3) RG 286 : Record Group 286: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48 - 2003(사료군 AUS056), Subject Files, 1956 - 1975 [Entry A1 31] (사료계열 AUS056_01)
4) 지역사 자료 : 전남 화순군 지역사 수집자료 (사료군 DGJ012), 전남 영광군 지역사 조사 수집 자료 (사료군 DGJ017), 경기 안양시 지역사 수집자료 (사료군 DKI012) 등 다수
5) 구술 자료 : 조산사의 체험과 출산문화 – 1950~1990년대 광주전남 조산사 (사료계열 COH013_11), 가족계획정책의 수립과 시행(1), (2) (사료계열 COH005_04)
6. 참고문헌
배은경,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 : 여성, 모성, 가족계획사업』, 시간여행, 2012.
조은주, 『가족과 통치 :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 창비, 2018.
윤정란, 「국가ㆍ여성ㆍ종교: 1960-1970년대 가족계획사업과 기독교 여성」,『여성과 역사』8, 2008.
집필: 임광순(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