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시기 한국의 '혁명상황'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
4·19혁명 시기 한국의 '혁명상황'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
1. 들어가며
냉전시대 미국은 전 세계 다양한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의 침략 야욕을 억제하여 '자유 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안보와 세계 전략에 연관된 국가들의 내부 문제에 개입했다. 미국은 군사쿠데타를 계획·지원하여 정권 교체를 도모하는 직접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원조 공여나 지원 등을 활용한 정치적 압력과 같은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다양한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물론 시기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그 방식을 달리하지만, 미국은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해방과 함께 냉전의 중요한 전선으로 떠오른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냉전시대 미국은 한반도 이남지역, 대한민국을 '반공의 보루'로 삼아 동아시아 안보의 한 축을 담당시키고자 했다. 한국은 공산주의 진영과 마주하고 있는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항상 한국의 정세를 주시하면서, 필요할 경우, 직접 개입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1950~60년대 미국이 한국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컸다. 특히 예상하지 못한 정권 교체 같은 특수한 상황은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4월 혁명과 그로 인한 정권 교체 시기는 어땠을까? 사료를 통해, 미국이 바라보는 1960년 4월, 한국의 '혁명 상황'을 살펴보자.
2. 4월혁명과 미국
4월혁명의 발생배경과 과정, 그 성격에 대해서는 1960년 4월 직후부터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일련의 연구를 통해 4월혁명은 단순히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중반이후 누적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과 사회 변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폭발한 사건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 독재정권의 정치 탄압도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미국의 무상원조, 희망을 찾기 어려운 농가 경제의 파탄,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충 등은 대중의 불만을 오랜 기간 누적시켰다. 대중의 오랜 불만은 부정선거라는 계기를 통해 4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한편 4월혁명과 관련하여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주한 연구들은 4월혁명 시기 미국의 개입 문제를 주목했다. 이 연구들은 공개된 미국 정부 문서를 바탕으로 미국이 이승만의 퇴진에 개입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미국이 개입하게 된 원인을 한국 대중의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분석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미국의 개입 또는 대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4월혁명으로부터 1년 뒤인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군사쿠데타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주한 미대사관은 3·15부정선거의 실상을 이른 시기부터 감시망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문제에 직접 개입할 생각이 미국 정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유당 정권의 민주주의 유린이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긴 했지만, 미국 정부는 직접적인 개입이 낳을 효과를 염려했다. 선거 이전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주한 미 대사관에 미국이 왜 부정선거를 관망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묻자, 주한 미 대사관은 '내정 불간섭 원칙'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에 미국이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유혈 사태를 동반한 직접적인 시위행동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의 입장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만약 미국이 이 문제를 인정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면, 한국 정부가 더욱 억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분노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이 부정선거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이 사태를 방관하지만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원조 공여 일정을 연기한 것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4월 중순까지는 실제로 이승만과 정부 요인에게 직접적인 개입 행동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4월 11일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어, 이날 밤 마산시민들의 시위가 다시 격화되자 또다시 미국의 고민이 깊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서울에서도 대규모 시위 행동이 발생했다. 4월 19일 시위는 또다시 유혈사태로 이어졌으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발생하면서 대한민국은 '혁명 상황'에 돌입했다. 이 시점에 이르자, 미국은 더 이상 간접적인 개입정책을 유지할 수 없었고, 상황 타개를 위해 직접 개입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과 주요 정부 요인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상황의 해결을 요구했다.
아래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문서들의 상위 사료철에는 서울의 주한 미대사관과 워싱턴의 미 국무부가 1960년 2월부터 4월 말 사이 주고받은 서신과 상황보고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료철을 통해,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이후 미국이 마산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시위상황을 주의 깊게 관측하고, 반정부·자유당 시위에 어떻게 대응할지 국무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기에 따라 미국의 입장이 미묘하게 바뀌는 과정 역시 엿볼 수 있어 특히 흥미롭다. 그럼, 이제 1960년 3월 이후 전개된 한국의 '4월혁명'을 둘러싼 주한 미대사관과 미 국무부 사이 오고간 긴박한 논의 내용을 직접 확인해보자.
3. 수집사료 소개
1) 1960년 3월 12일 주한 미대사관 그린 참사관이 국무부로 보낸 전문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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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2_24_07C0001_036 | Telegram from Green, Seoul to Secretary of State | 1960-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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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문은 주한 미대사관의 마샬 그린 참사관(부대사)이 3월 11일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을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미 국무부에 보고한 것이다. 이 대화에서 장면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정행위를 지적하며, 미국의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
2) 1960년 4월 15일 미 국무부 허터 장관이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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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2_24_07C0002_012 | Telegram from Herter to American Embassy Seoul | 196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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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1960년 4월 15일자로 미 국무부 허터 장관이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이다. 부정선거 이전부터 한국의 ‘혁명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미국 정부는 4월 11일 2차 마산시위 이후 기존의 ‘내정 불간섭’ 원칙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인다. |
3) 1960년 4월 19일 주한 미대사관 매카나기 대사가 국무부로 보낸 전문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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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2_24_07C0002_034 | Telegram from McConaughy, Seoul to Secretary of State | 1960-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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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문은 1960년 4월 19일 주한 미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것이다. 4월 19일 서울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한 이후, 매카나기 대사는 오후 9시경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50분 정도의 면담을 진행하였다. 매카나기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받은 첫인상은 이승만이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은 현 상황이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소수 집단에 의해서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에 친화적인 언론사에 대한 시위대의 공격, 경무대로의 진출 시도를 그 근거로 들었다. 또한 이승만은 민주당을 비난하면서 민주당이 자신을 흔들기 위해 이러한 상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이승만은 학생들의 사망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했지만, 매카나기 대사가 현재 파악되는 인원을 말해주기 전까지 그 숫자 역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매카나기 대사는 이승만과 대비되는 미국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하면서, 현재 상황의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우선 미국은 현 상황이 공산주의자가 유도한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대한 대중의 엄청난 반발이 핵심적인 계기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놀랍게도, 이승만은 그와 같은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이에 관해서는 내각에서 보고한 사실 그대로 믿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이승만이 정말로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보면서, 이 사실을 들은 후 이승만이 흔들리는 듯했다고 보고서에 썼다. 매카나기 대사는 현 상황 해결을 위해서는 강경한 조치보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자료에서 확인되는 주한 미대사관의 입장은 다음 날 매카나기 대사의 성명을 통해 반복되었다. 다음날 매카나기 대사는 19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태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전하는 가운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사태가 발생한 기본적인 이유와 동기, 분노를 참작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미 대사의 성명은 대중들의 격렬한 시위를 유발한 근본적인 원인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있다고 보고 있는 미국의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
4) 주한 미대사관 매카나기 대사가 국무부로 보낸 전문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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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2_24_07C0003_005 | Telegram from McConaughy, Seoul to Secretary of State | 196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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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이후로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에서의 시위는 격화되었고, 4월 26일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면서, ‘혁명상황’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날 저녁 점점 더 많은 시위 인원이 광화문으로 모였고, 사태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이 자료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 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다. 이 자료는 4월 26일 오전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와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이승만을 찾아가기 전 작성된 문서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그 성격상 이승만과의 면담 이후 언론에 어떤 방향성을 갖고 이야기할 것인지를 국무부에 보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보고하기 직전의 상황보고들은 한국, 특히 서울의 시위상황이 점점 격화되어 더욱 큰 충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카나기 대사는 주한미대사관이 더 이상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으며, 이에 관해 분명한 입장표명을 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문에 적었다. 이후 대사관의 성명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데, 이 성명을 살펴보면, 하루라도 빨리 현재 한국의 ‘혁명상황’이 정리되어 한국 사회가 안정을 되찾길 바라는 미국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한국 시민들은 행정당국을 도와 질서를 유지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행정당국 또한 시민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하루바삐 이 사태를 해결할 책임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을 되찾길 바라면서, 성명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This is no time for temporizing).” |
4. 미국의 1960년 4월 한국 '혁명상황' 인식에 관한 수집사료 현황 및 사료이력
1960년대 초반은 두 번의 정권 교체가 진행된 긴박한 시기였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장면과 민주당 정권이 성립했으나, 1년 만에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군사정부가 성립되는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은 한국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하며 시급한 사안이었다. 주한 미대사관과 워싱턴의 국무부는 한국 상황에 관한 자세한 상황보고와 논의를 시간 단위로 주고 받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위에서 이러한 내용을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 2180(1-4)(사료철: AUS002_24_07C0001~4)"를 통해 소개하였다.
4월혁명 시기 미국의 한국 상황 인식은 미 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이 생산한 사료들이 묶여있는 RG84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부가 미 태평양 사령부에 보고한 4월혁명 전개과정에 대한 전문은 "RG 84,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60, Entry Seoul, Korea, 1956-63, Box 17, 350: Riots(Military Reports), 1960(사료철 AUS003_06_02C008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갈래의 사료철들을 교차하여 본다면, 이 당시 4월혁명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글에서 주로 소개한 사료철들(AUS002_24_07C0001~4)은 관련 연구에서도 주로 참고하고 있는 핵심적인 자료이다.
위 사료철들 이외에도 국사편찬위원회는 4월혁명에 관련된 많은 국외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Korea 1960 - [U.S. Policy toward Korea](AUS086_06_00C0055"는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온라인 열람가능). 이 사료는 1960년 6월 9일부터 1961년 1월 27일 사이에 생산된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 보고서로서, 아이젠하워 도서관에서 수집한 자료이다. 사료철은 1960년 4월 혁명 이후의 정세를 정리한 보고서를 담고 있다. 4월혁명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 대중의 미국에 대한 여론, 과도정부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5. 4월 혁명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사료 목록
1) 국사편찬위원회-RG 59: General Record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63-2002 -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 2180 (1) [AUS002_24_07C0001]
2) 국사편찬위원회-RG 59: General Record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63-2002 -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 2180 (2) [AUS002_24_07C0002]
3) 국사편찬위원회-RG 59: General Record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63-2002 -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 2180 (3) [AUS002_24_07C0003]
4) 국사편찬위원회-RG 59: General Record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63-2002 -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 2180 (4) [AUS002_24_07C0004]
5) 국사편찬위원회-RG 59: General Record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63-2002 - Central Decimal Files, 1960-1963, Entry CDF, 1960-63, Boxes 2186-2188 [AUS002_24_07C0009]
6. 참고자료
홍석률, 「4월 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과정」, 『역사문화연구』36, 2010.
이완범, 「장면과 정권교체_미국의 대안고려와 그 포기과정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34, 2003.
이재봉, 「4월 혁명, 제2공화국, 그리고 한미관계」,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 1996.
정용욱, 「이승만 정부의 붕괴: 이승만 정부의 대응 및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4권』, 오름, 1998.
박명림, 「4월 혁명과 5.16군사쿠데타에서 미국의 역할」, 『역사비평』113, 2015.
집필: 이휘현(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