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강화조약 이후 발생한 독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

대일강화조약 이후 발생한 독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

 

1. 들어가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독도분쟁은 한일 간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지위가 작용하고 있다. 즉 독도문제는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인 영향력과 결정력이 초래한 지역문제이다. 따라서 독도분쟁은 한일관계라기보다는 한미일관계로 인한 문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역사적 영유권의 문제라기보다는 국제정치적인 지역 문제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한국정부의 독도영유권에 관한 주장이 소외되고, 독도에 관한 문제가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으면서 이후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전후 냉전이 본격화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가 냉전의 최전선으로 부상하면서, 과거 식민통치에 대한 제국들의 책임 문제가 간과되었고, 일본과 당연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국들의 입장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일강화조약은 중요한 한계를 갖고 있다. 한국 역시 협상참가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식민지 배상문제, 독도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한일 정부가 이후에 협의할 문제로 유보되었다. 이 가운데 미국은 한일갈등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구상한 지역 구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한일 분쟁의 중심에 있는 독도분쟁을 통해 1950년대 초반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문제

 

1952년 1월 18일 한국 정부는 해양주권 선언, 일명 평화선을 발표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10일 뒤인 1월 28일 독도를 일본령이라고 선언하면서, '독도 영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가 주장한 평화선의 초점은 어업구역과 어업권 확보라는 경제적 차원에 있었던 반면, 일본은 영토·주권 문제로 이 문제를 끌고 가면서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양국 모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쟁점이 되었다. 한국은 이 문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서, 한국 영토에 대한 침범 야욕으로 인식하는 반면, 일본은 자국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해 한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몰아가면서,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한일 갈등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독도분쟁은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의 준비와 체결과정, 그 이후 일련의 처리 과정에 연원을 두고 있다. 독도분쟁은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 갈등처럼 비추어졌지만, 본질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구축과정에서 파생된 국체정치 분쟁이다. 따라서 독도분쟁의 기원과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고착화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미국의 역할과 지위가 고려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세계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판도를 자신의 구상대로 구축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한일 간 독도 분쟁에 자연스럽게 개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사전작업과 로비를 진행했다. 일본은 독도뿐만 아니라,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 1870년대 이후 영토 확장 과정에서 자신들이 강제적으로 편입한 섬들을 일본의 영토로 유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패전직후부터 분쟁지역이 될 수 있는 섬들이 자국 영토라는 것을 입증하는 각종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 이때 미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여,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동맹국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일본은 왜곡된 정보와 철저한 로비를 통해 미국 정부로부터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영토문제에 한해서 미국이 한국정부의 입장을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한국은 조약서명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었고, 조약의 불합리한 내용에 적절한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영토 문제의 경우, 미국은 한국이 제기한 대마도의 반환, 독도 반환 문제를 인지하고 이러한 요구의 신빙성과 근거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당시 한국 측의 자료와 근거는 미국의 시선에서 볼 때 빈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딘 러스크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는 1951년 8월 미국은 독도를 일본령이라고 인지하고 있으며,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한국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답변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이러한 공식입장을 일본정부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독도분쟁으로 인해 한일 간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동맹국 간의 분쟁을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관해 미 국무부와 주일미대사관 사이에서는 딘 러스크의 비망록을 공개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 논쟁은 쉽게 끝나진 않았지만, 미국은 이미 독도분쟁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에 딘 러스크 서한의 내용을 인정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에 문제를 이관할 것을 권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갈등은 1950년대 중반 시점에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 측은 당시 딘 러스크의 서한, 즉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고, 한국 측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에 귀속영토란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자신들의 근거를 바탕으로 독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구분해야 할 점은 1951년 미 국무부의 딘 러스크가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덜레스 미 국무부장관은 이 문제는 한일 간 조정의 영역이며, 만약 해결되지 않을 시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문제라고 지적했다. 즉 미국의 입장은 1950년대, 그리고 그로부터 70년이나 지난 지금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 살펴볼 자료들은 독도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이 이상 한일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미국의 입장이 담겨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한일 간 독도분쟁의 냉전적 기원을 보여준다.

 

3. 수집사료 소개

 

1) 독도 (미 국무부 동북아시아 국장이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에게 보낸 문서, 1952. 11. 14.)

참조코드 제목 생산일자
AUS002_01_00C0294 I-5.10, Liancourt Rocks (Takeshima or Dok-do Island), 1952 1952-11-14

이 문서는 1952년 11월 14일 미 국무부 동북아시아국장 케네스 영(Kenneth T. Young)이 주한 미 대사관 참사관이었던 앨런 라이트너(E. Allan Lighner)에게 보낸 기밀 문서이다. 1951년 8월 4일 미 국무부 차관 딘 러스크가 보낸 한국 정부측에 공한의 내용과 이에 대한 의견이 담겨 있다.

이 시기 국무부는 주일 미 대사관과 주한 미 대사관으로부터 끊임없이 독도분쟁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 자료를 보면,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이 거의 반영되지 못한 사실을 미국도 인지하고 있었고, 독도분쟁이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정부는 기존의 대한제국의 영토였던 땅이 대한민국의 영토로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독도와 파랑도 등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했고, 그로 인해 나온 것이 1951년 8월 10일 딘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 앞으로 보낸 공한이다.

이 자료는 그대로 인용해놓았는데, 이 내용은 중요하므로,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으로 불리는 이 무인도는, 우리 측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 하에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었다.”

즉, 미 국무부는 독도가 한국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귀속될 영토가 아니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대일강화조약 이후, 일본령이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 대한 한국 측의 답변을 자료를 통해 확인하긴 어려우나,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철저히 일본 측이 제공한 정보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한국 정부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 이후로도 한국정부는 계속해서 독도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편 중요한 것은,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는 딘 러스크의 공한은 공개여부를 놓고 이후 미 국무부와 주일 미 대사관, 주한 미 대사관 간의 치열한 화두가 되었다. 이 공한을 공개하며, 일본 측에 미국 측 입장을 전달하는 것은 독도 분쟁 뿐만 아니라, 한미일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2) 독도 분쟁에 관한 비망록 (1953. 7. 22.)

참조코드 제목 생산일자
AUS002_01_00C0295 I-5.10, Liancourt Rocks (Takeshima or Dok-to Island) 1953-07-22

이 문서는 1953년 7월 22일 작성된 것으로서, "한일 간 독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가능한 방안 모색"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문서 제목 그대로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 미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953년 7월 12일 독도 근처를 순찰하는 일본 경비정에 대해 독도에 배치된 한국 경비병들이 사격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무력시위에 분노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한 강력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일본 외무성에서는 한국과 직접 대화를 다시 시도하는 한편, 미국 정부에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요청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일본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거나, 일본 해안경비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이 문서는 1953년 7월 시점 미국의 입장을 담고 있다.

이 문제는 한일 간의 주권에 관한 문제로서 미국이 함부로 개입하기 어렵지만,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법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미국은 1951년 8월 10일 러스크 공한을 통해 일본의 손을 들어준 바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1952년 12월 4일, 독도 일대에서의 미국 포격 훈련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의가 있었을 때도, 미국은 러스크 공한의 입장을 반복해서 전달했지만,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도 한국령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는 독도가 대한민국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히 했고, 일본과의 영토 분쟁에서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보기에, 일본이 가능한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다고 자료는 적고 있다. 첫째는 미국 정부에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이것은 최대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미국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 한국과 일본 모두와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에게 이로울 점이 없었다. 두번째와 세번째는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으로 이 문제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두번째,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것이 유력하게 고려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 또는 만약 한국에게 불리한 결론이 났을 때, 한국 정부가 이에 따를 것인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상황 고려 속에서, 미국 정부 입장에서 권장할 만한 선택지는 우선 첫째,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방관자의 입장에서 한일 정부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미국 정부에게 중재를 요청하면, 이를 거절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렇지 않다면, 국제사법재판소로 문제를 끌고 갈 것이 권하는 것이 그 다음으로 고려되었다. 만약 일본이 법적 차원의 입장 표명을 요청한다면, 딘 러스크의 공한을 공개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언급되고 있다. 즉 요약하면, “법적으로만 따지자면, 일본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 미국은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이후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져가게 된다.

 

 3) 독도에 관한 주일 미대사관 비망록 (1953. 4.)

참조코드 제목 생산연월
AUS003_05_00C0007_003 Liancourt Rocks [독도] 1953-04

(※ 위의 문서 원문은 전자사료관에서 해당 사료건에 연결된 사료철[사료참조코드:AUS003_05_00C0007]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자료는 1953년 4월 초 주일 미 대사관 2등 서기관인 핀(R. B. Finn)이 같은 주일 미 대사관 1등 서기관인 레온하트(L. D. Leonhart)를 위해 작성한 비망록이다. 이 비망록은 이 시기 주일 미 대사관에서 생각한 적절한 독도분쟁 해결책에 대한 의견이 담겨 있다.

핀은 이제는 국무부가 계속되고 있는 독도분쟁에 관한 적절한 의견을 제시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지적했다. 1952년 1월 초 본격적으로 불거진 독도영유권 분쟁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고, 이로 인해 한일관계 정상화가 난관에 부딪힌 현 상황을 미국 정부가 그저 관망만 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미 미국 정부는 지난해 양유찬 주미대사를 경유해 한국 정부에게, 독도를 한국령으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핀은, 물론 한일 간의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상황을 좋다고 보긴 어렵지만, 이 문제를 이제는 분명히 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 비망록 하단에는, 1등 서기관인 레온하트의 메모가 있어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온하트는 핀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으며, 한국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한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러스크의 1951년 8월 10일자 서한을 공개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추가의견을 전달하였다. 딘 러스크 서한은 미 국무부가 독도를 한국령보다는 일본령이라고 보고 있다는 의견을 담고 있으므로, 이것이 일본 정부에게 공개될 경우, 한일 간 분쟁상황은 일본 정부에게 훨씬 유리해질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1953년 시점에 주일 미 대사관은 일본 정부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한국 정부의 의견이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측의 독도 영유권 인식은 패전직후부터 자신들이 영유했던 섬들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일본 측의 치밀한 노력과 로비로 인한 것으로, 객관적인 사실관계 확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4) 대일 평화조약과 독도문제에 관한 미국무부 훈령 (1953. 12. 9.)

참조코드 제목 생산일자
AUS003_05_00C0007_004 Telegram [대일 평화조약과 독도문제에 관한 미국무부 훈령] 1953-12-09

(※ 위의 문서 원문은 전자사료관에서 해당 사료건에 연결된 사료철[사료참조코드:AUS003_05_00C0007]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전문은 1953년 12월 9일 미 국무부 장관 덜레스가 주일 미 대사관과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훈령이다.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독도분쟁과 관련해 미 국무부, 주일 미 대사관, 주한 미 대사관은 끊임 없는 논의를 계속했다. 12월 9일자 이 훈령은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훈령은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개입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아직 지난 1951년 8월 10일 딘 러스크의 공한에 있는 미국 측의 입장을 일본에 전달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분쟁의 종식을 위해 미국 정부는 이 공한의 내용, 즉 독도를 일본령으로 보고 있다는 미국의 입장을 언젠가는 일본 측에 알려주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덜레스 장관은 이미 한일 관계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고, 추가로 불거질 수 있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딘 러스크 공한의 공개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포츠담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이 문제가 연결된 사안이긴 하지만, 이것이 독도 분쟁과 같은 영토와 주권 문제에 대한 미국 측의 무조건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샌프란시스코회담 이후 독도분쟁 문제에 대한 미국의 해석이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미국은 조약서명국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란 것이 덜레스의 생각이었다. 미국의 해석일 뿐, 연합국의 합의된 공의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 측의 입장표명이 곧바로 분쟁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란 것이었다. 따라서 덜레스는 미국이 독도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한일 간 조정이 안 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문제라고 정리하였다.

이와 같은 미 국무부와 덜레스의 판단은 이후 한일관계 그리고 한미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약 미국이 이때 독도분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딘 러스크의 공한을 공개하여 일본 측 독도 영유 주장에 일방적인 힘을 실어주었더라면, 한미일 관계는 또 다른 파국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유보적 판단은 미국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소유권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후 일본을 미국의 주요 동맹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정책 방향성이 있었다. 미국의 이해 속에 일본은 기존 자신들이 영유했던 주변 도서 지역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문제를 한일 양국 간의 문제로 넘기고,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였다. 

1953년 12월의 이 문서에 드러난 미국 측 입장은 약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 19세기 후반 일본제국주의가 침탈한 독도의 영유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로 온전히 회수되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으로부터 침탈한 땅을 모두 반환시킨다고 카이로선언에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는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선의 기존 영토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문제는 여전히 한일 간 갈등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독도분쟁과 관련해 일본 측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미국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 자료에 담겨 있다.

 

4. 독도분쟁을 둘러싼 미국의 입장에 관한 수집사료 현황 및 사료이력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수집한 독도 관련 자료들을 모아 2008년에 『독도 자료: 미국편 1~3』(총 3책)을 간행하였다. 이 자료집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에서 e-Book으로 열람이 가능하다.

 

독도 자료 1, 미국 편 - [1945.8-1951.6] / [국사편찬위원회 편]

http://library.history.go.kr/dhrs/dhrsXIFViewer.jsp?system=dlidb&id=000000204037

 

독도 자료 2, 미국 편 - [1951.7-1953.10] / [국사편찬위원회 편]

http://library.history.go.kr/dhrs/dhrsXIFViewer.jsp?system=dlidb&id=000000204047

 

독도 자료 3, 미국 편 - [1953.11-1960.4] / [국사편찬위원회 편]

http://library.history.go.kr/dhrs/dhrsXIFViewer.jsp?system=dlidb&id=000000204057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이후 독도분쟁을 둘러싼 미국의 입장을 보여주는 미국 측 사료는 크게 두 가지 문서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미 국무부 문서군인 RG59 안에서 독도분쟁을 둘러싼 한일 간 입장차이를 확인하고, 이에 관한 미국 측 입장을 고민하는 미국 내 논의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료철 [AUS002_01_00C0294~5]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 관료, 한국 대사, 일본 언론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각자의 입장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평화선 주장을 계기로 한일 간의 영토 및 어업수역 문제로 처음 등장한 독도영유권 분쟁이 한국의 주권 국가화, 전후 제3세계 질서 수립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독도분쟁과 관련해서 중요한 미국측 자료는 미국의 재외공관(현지 대사관) 문서군인 RG84군을 주로 참고할 수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관련 자료를 다수 수집하고 있다. 특히 주한 미 대사관뿐만 아니라, 주일 미 대사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무부와 서울과 도쿄의 대사관 사이의 전문이 주로 수집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한 [AUS003_05_00C0001]은 독도분쟁을 미국이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많은 분량의 내용이 담겨 있다. 수집한 자료들은 1950년대 중반까지의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내용들을 통해 대일강화조약 이후 미국이 독도분쟁을 파악하는 방식과,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어떤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는 “독도”를 키워드로 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한 다수의 자료들을 검색할 수 있다. 독도 문제는 단순히 국가간 영토분쟁에 그치지 않고,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1965년에야 마무리된 한일 국교 정상화의 흐름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독도분쟁 자료들은 대부분 한일관계 정상화 관련 자료들과 함께 묶여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약 39건의 사료철을 확인할 수 있다.

 

5. 독도분쟁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사료 목록

 

1) RG 84, Japan, Tokyo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2, Box 1, 320, Japan-Korea, Liancourt Rocks, 1952

[사료철 AUS003_05_00C0001]

 

2) I-5.10, Liancourt Rocks (Takeshima or Dok-do Island), 1952

[사료철 AUS002_01_00C0294]

 

3) I-5.10, Liancourt Rocks (Takeshima or Dok-to Island)

[사료철 AUS002_01_00C0295]

 

4) RG 84, Japan, Tokyo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3-1955, Entry # 2828A, Box No. 23, 322.1 Liancourt Rocks, etc. (1 of 2)

[사료철 AUS003_05_00C0007]

 

6. 참고문헌

 

정병준, 「한일독도영유권 논쟁과 미국의 역할」, 『역사와현실』60, 2006.

정병준, 『독도 1947: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돌베개, 2010.

정병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한반도 관련 조항과 한국정부의 대응』,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원, 2019.

조성훈,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대일전략과 독도귀속문제」, 『국제지역연구』17권2호, 2008.

 

집필:  이휘현(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