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미국의 한국경제 전망과 원조협정 개정
1960년대 초반 미국의 한국경제 전망과 원조협정 개정
1. 들어가며
미국의 대외원조사업은 1950년대 말 거센 비판을 받으며, 사업 전반의 ‘정상화’가 요구되었다. 대외원조 사업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과 국제수지 악화로 인해 시작된 대외원조정책 조정 작업은 원조정책의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여,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고,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때 6·25전쟁 이후 대규모 원조를 공여받고 있던 한국에 대한 원조사업은 감축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경제원조의 확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한미 간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대외원조정책 조정과 그것이 한국에 적용되는 과정은 이 시기 미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과 전망, 한미관계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
1961년 체결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6·25전쟁 이후 예외조항을 적용받고 있던 한국의 원조사업구조를 다른 국가와 동일한 형태로 되돌린 협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진행된 대한원조의 ‘정상화(Nomalization)’는 전 세계적인 원조 부담을 줄이고자 한 미국의 의도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미국은 단순히 원조 절차를 변경하는 것을 넘어, 대한원조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한국의 경제 전망에 대한 면밀한 판단을 통해 예외 사례였던 대한원조사업을 ‘정상’ 상태로 조정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한미관계의 재설정이라는 맥락 위에서 체결 과정과 논의 내용, 관련 쟁점들을 차근히 살피며 그 함의를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1960년을 전후한 시기 한미관계 변화와 이 과정에서 체결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에 관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2. 미국의 대한원조정책 변화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1950년대 후반 아이젠하워 행정부 말기에서부터 1960년대 초반 케네디 행정부로 이어지는 시기는 미국이 대외원조정책을 전면적으로 조정하는 시기였다. 1950년대 유례없는 대규모의 대외원조를 실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원조사업이 과연 미국의 안보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새로운 정책을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이 시기 미국은 대외원조 기구를 신설하고, 각 지역의 원조정책을 재검토하여,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의 방향성에 맞게끔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주요한 검토 대상국가였다. 즉, 이 시기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는 전반적인 미국 대외원조정책의 변화 속에서 대한원조의 적절한 수준과 방향을 다시금 설정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미국은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을 검토하면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분리하여 다루고자 했다. 이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구분하여, 그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야만 사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군사원조는 필요하지만, 경제원조의 효과가 낮을 것으로 전망되는 국가에 대해서는 그에 적합한 형태의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을 모색하고자 했다. 또한 원조사업의 예외사례를 최대한 보편적인 형태로 되돌리고자 했다.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긴급한 원조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업계획 평가, 타당성 검토 등 적절한 의회의 예산심의 절차를 통해 원조 사업이 진행될 것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개편 논의들은 모두 대외원조 예산 지출의 효용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고 장면-민주당 정부가 새롭게 등장한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은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무상원조가 감소하면서, 경제상황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제성장 둔화로 인한 대규모 실업 문제와 가난은 심각한 사회 문제였으며, 실제로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계속된 부정부패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만은 4·19혁명에 대다수 민중이 참여한 원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장면 정부에게 경제개발은 단순히 경제문제가 아니라 혁명이후 요동친 한국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고, 그간 적용해왔던 ‘특혜’를 폐지하려 했기 때문에, 한미 간 갈등이 확대되었다.
우선 미국은 1959년 주한 미 경제협조처(USOM/K)를 설치하였다. 이전까지 한국 원조사업의 주도권은 주한유엔군사령부가 갖고 있었으며, 경제원조와 관련된 문제의 진행과 합의는 경제조정관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사업 구조는 한국의 상황을 반영한 이례적인 것이었다. 주한 미 경제협조처의 설치는 이러한 특수한 형태를 다른 원조수혜국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개편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원조사업의 운영과 감독 권한을 주한 미 대사에게 부여하고, 상호안전보장법에서 규정한 한국에 대한 특례조항도 철폐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미국이 전시와 전후복구라는 긴급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대한원조사업이 이제는 ‘정상화’되어야 할 때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안전보장법이 수정되고 주한 미 경제협조처가 신설되면서, 대한원조사업이 근거할 새 협정이 맺어질 필요가 있었다.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대한원조의 ‘정상화’를 명문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료를 통해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협정문제만큼이나 미국은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국은 환율개혁을 포함하여, 시장질서에 근거한 경제체제 구축을 추가 원조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국의 원조가 무한정 지속될 수 없으며, 한국이 자립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무역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6·25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났으며, 미국의 경제원조가 감소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한국경제가 나아가길 원했다.
1961년 2월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의 대한원조사업은 전시상황의 특수한 사업구조에서 평시상황의 사업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대한원조의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유시장 질서에 따른 자원의 교환과 배분이 가능하게 할 것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이 시기 미국이 한국에 요구한 내용의 방향성은 분명했다. 더 이상 원조를 통한 관계가 아니라, 무역과 투자를 통한 관계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란 것이었다. 즉 전쟁을 통해 맺어진 특수한 한미관계의 성격을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되돌리려는 것이 대한원조 ‘정상화’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의 대규모 파병은 이러한 정책 변화의 흐름을 또 다시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3. 수집사료 소개
1) 맨스필드(Mansfield) 개정안 관련 주한 미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 (1960. 1. 27.)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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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3_06_02C0126_056 | Mansfield Amendment- Section 503(c) MSA 1959 | 1960-0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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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주한 미 대사인 매카나기가 1960년 1월 27일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다.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이자 외교분과위원회 위원장인 마이크 맨스필드(Mike J. asfield)는 미국 대외원조정책에 대해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비판을 제기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이다. 특히 1959년에는 남베트남 원조를 반대하면서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원조는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주당 중진의원인 맨스필드의 이러한 입장은 대한원조사업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며, 미 국무부와 주한미대사관, 원조당국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전문은 원조감축 논의와 관련하여 향후 대한원조사업의 전망을 정리해 보고한 것이다. 사실 1958년 이후 무상원조는 이미 감축기조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 미 대사관은 결론적으로, 한국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면, 한국의 국제수지 적자는 점차 감소할 것이며, 이에 따라 무상원조 역시 1959년 220백만불 수준에서 1965년 110백만불, 1970년 50백만불 정도로 감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맨스필드를 포함한 대외원조 비판론자들 사이에서 대한원조사업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주한미대사관과 국무부 역시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점차 줄여나갈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문에서는 무상원조를 감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을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1) 한국정부는 수출을 증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한일 간 무역을 정상화하는 것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2) 환율을 현실화해야 한다. 3) 외환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4) 재정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5) 조세 정책을 개혁하고 생산과 투자 분야에서 민간 이니셔티브를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6)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분명하고 효율적인 정책과 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한다. 등등 14개의 항목을 나열해 제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 정부가 취해야 할 행동 역시 제안하고 있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는 1) 한국의 GNP가 매년 4.5%는 성장할 수 있을 정도의 투자 수준을 보충할 수 있도록 충분한 경제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2) 한국의 전후복구 단계가 끝났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해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충분한 군사예산을 필요할 경우 지원해야 한다 4) 한국정부가 적절한 정책을 실시하도록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등 다섯 가지 중점을 세부적인 내용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무상원조는 이후 꾸준히 감소될 것이지만, 한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미국은 필요한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 같은 사료철 안에 있는 사료건[AUS003_06_02C0126_052]가 있다. 이 사료는 미 국무부에서 원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각 국가 대사관으로 보낸 문서인데, 맨스필드에 의해 대외원조법이 개정되면서, 원조가 이후 감소될 여지가 있으므로, 각 지역은 이에 대응한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 자료는 미 의회의 법 개정이 실제 원조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맨스필드 개정안이 대한원조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2) '한국에 대한 추가 원조' 관련 미 국무부 비망록 (1960. 10. 19.)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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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3_06_02C0126_027 | Supplemental Aid to Korea | 1960-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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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미 국무부 극동담당부서에서 1960년 10월 19일 작성한 비망록이다. 1950년대 후반 이후 대한원조의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붕괴된 이후 한국정부의 경제개혁을 압박하였다. 경제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었던 장면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통해 필요한 원조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비망록은 양국의 협상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10월의 상황을 담고 있다. 우선 이 비망록은 10월 14일 있었던 회의를 언급하면서, 한국이 적절한 개혁조치를 취한다면, 미국이 그 대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정부가 환율개혁, 공공요금 현실화, 원조절차 정상화(상호안전보장법 131(d)항 개정 내용을 반영한)가 이루어진다면, 회계연도 1961년의 방위지원원조를 추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이 중요하다. 이는 미국이 원조를 매개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원조 자금이 매우 급했던 장면 정부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알 수 있다. 이 비망록이 작성된 19일 시점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이 아직 논의 중에 있었고, 이 비망록에서는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에 관해서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미국이 요구한 내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환율 현실화이다. 미국은 한국의 비현실적인 환율 수준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장면정부 집권이후 9~10월 워싱턴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경제문제 관련 협상에서 환율문제는 주요 쟁점이었다. 미국은 환율 현실화가 한국 경제의 여러 병폐를 제거할 수 있는 기초라고 강조하였다. 지나치게 고평가된 원화가격은 원조자금의 비효율적 활용의 원인이자, 한국의 수출 증가를 제약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미국은 대한원조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환율을 현실화하여, 자금의 효율적 사용을 도모하고, 수출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추가 원조 공여의 전제조건으로 내걸면서까지 환율 현실화를 한국정부에 요구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개혁은 앞서 소개한 사료 [AUS003_06_02C0126_052]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미국 대한원조의 감축이 예상되는 가운데,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미일변도였던 한국의 경제 관계, 즉 수출, 수입, 투자, 차관 등의 경제거래가 ‘자유세계’ 내 다른 국가들로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한국경제의 기본적인 구조, 자유시장 질서 확립과 환율 현실화 등을 통한 개혁을 압박했다. 즉, 미국은 한국이 ‘자유세계’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원조-피원조 국가 간 관계가 아닌 무역과 투자를 통해 맺어진 국가 간 관계로 전환하길 원했고, 이는 대한원조 ‘정상화’ 정책의 중요한 축이었던 것이다. |
3)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관련 주한미군사령관이 주한미대사관에게 보낸 의견서 (1960. 12. 31.)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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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4_108_00C0023 | GEN Magruder, Jan-Jun 1961 (Conf.) | 1960-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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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새로 체결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에 관한 주한 미 대사관과 주한유엔군사령부 간의 논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 12월에 성안된 원조협정 초안과 원조협정에 관한 주한미군사령관 매그루더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상호안전보장법이 수정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원조협정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선 매그루더 역시 동의하고 있었다. 매그루더는 과거 미국의 대한원조 사업에서는 경제적 원조와 군사적 노력간의 긴밀한 관계가 잘 유지되어 왔으며, 강력한 경제는 강력한 국방력을 지지하는 핵심이라고 지적하면서, 앞으로도 군사원조와 경제원조 간의 연계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경제적 자립은 한국이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지만, 주의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하면서, 새 원조협정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했다. 새로운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고, 경제원조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군사원조에 관한 내용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여 각 원조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외원조정책 조정 과정 중에 논의된 내용이지만, 현지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이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매그루더 장군은 한국은 여전히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접경지역이며, 군사적 위험요소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원조는 군사적 측면에 대한 강한 고려 속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실제로 1959년 주한 미 경제협조처의 설치와 함께 대한원조사업의 주도권은 주한미대사관과 현지원조사업단으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군은 이에 대해 꾸준히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군사원조에 관한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국무부와 원조당국의 입장이 관철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군사원조와 경제원조의 분리,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 검토에 따른 효율적인 경제원조자금 사용은 1960년을 전후한 미국 대외원조정책 개혁의 핵심이었고, 이것은 미국 내부, 특히 군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지 원조사업에서 반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의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였고, 한국군을 유지시키기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1960년대까지 높은 수준으로 지속되었다. |
4)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국회 비준 관련 주한미대사가 미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 (1961. 2. 13.)
참조코드 | 제목 | 생산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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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003_06_02C0111_038 | Telegram from McConaughy to SecState | 1961-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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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주한 미 대사관에서 1961년 2월 13일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다. 이 전문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국회 비준을 앞두고 국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약 두달 여 간의 논의 끝에 협정문에 관해 합의를 마치고 한미 정부 간에 조인까지 마무리되었다. 미국이 원조 공여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것 중 하나였던 새로운 원조협정의 체결 시한이 3월 1일 이전까지였으므로, 한국 정부는 2월 말까지 국회에 경제기술원조협정의 인준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원조협정의 일부 조항을 두고 주권 침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면서 국회 인준에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문제가 된 조항들은 제3항 원조자금의 사용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자에게 사업 및 그 계획과 관계기록을 제약없이 관찰하고 재검토할 것을 허용한다. 제5항 원조사절단원에 대한 면세특권을 제공한다. 제6항 계약자가 원조계획을 수행하는 목적으로 도입하는 모든 물품에 면세특권을 제공한다. 이 세 개 항이 문제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제3항과 6항이 주권침해 논란을 낳았다. 민주당은 만약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는데 있어 협조적인 방식으로 한국을 존중한다면, 이처럼 중요한 외교문서에 이러한 문구를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협정문이 공개된 후 대학생들과 혁신세력들 사이에서도 미국에 대한 비난 여론이 생겨나면서 시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 전문은 위와 같은 여론을 국무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매카나기 미 대사는 2월 16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공표하였다. 성명서를 통해 매카나기 대사는 한국의 자립과 경제복지 증진을 미국이 결의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이유와 욕망 및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또한 이 협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상호안전보장협정을 체결할 때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문제가 된 제3조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 똑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의 주권침해 논란에 대한 한국 정부와 매카나기 대사의 설명은 사실 그대로였다. 1961년 2월 체결된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은 이전까지 특수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예외사례'였던 대한원조사업의 형식과 구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미국이 협정체결과정에서 '정상화(Nomalization)'이란 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서 다른 사료와 함께 설명한 것처럼 '정상화'는 단순히 원조절차만을 정상화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대한원조 '정상화'는 6·25전쟁이후 대규모 군사·경제원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성격도 함께 갖고 있었다. |
4.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개정에 관한 수집사료 현황 및 사료이력
국사편찬위원회는 1960년대 한미관계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사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한미원조협정의 개정은 단순히 이전의 협정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6·25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한미원조의 특수한 성격을 제거하고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이는 상호안전보장법에서 한국에 부여한 '특권'을 제거하는 문제와 연계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원조협정 개정은 1960년대 초반 한미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한 미 대사관은 국무부, 주한유엔군사령부와 심도 깊은 논의를 긴밀히 진행하였다. 사료철 [사료철 AUS003_06_02C0111], [사료철 AUS003_06_02C0126]은 상호안전보장법과 원조협정 개정에 관한 논의 내용을 담고 있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원조와 관련된 문제이므로 미 원조당국의 관계 문서군에서도 관련 내용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우선 1961년까지의 원조당국 자료를 포함하는 문서군인 RG469에서 1960년 진행된 상호안전보장법 개정과 원조협정 개정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사료철 [AUS014_35_00C0662], [AUS014_35_00C0662]은 원조협정 개정과 관련해 원조당국과 주한 미 대사관, 미 국무부 사이에 왕래한 전문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원조협정 체결당시 쟁점이 되었던 문제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꼭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61년 이후 원조를 주관한 미 국제개발처의 자료를 묶은 문서군 RG286에서도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료철 [AUS056_08_00C0009]은 협정문과 협정체결 이후 한국 의회에서 문제 제기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미 육군의 단위 부대기록 문서군인 RG338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미 군정 시기와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미8군) 자료들을 꾸준히 수집해왔다. 이 중 사료계열 Eighth US Army-Adjutant General Section, Classified General Officer Correspondence, 1959-63 [Entry A-1 298] [AUS004_108]은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8군 사령관과 참모진이 주고 받은 서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안에서 주한 미 대사관과 원조협정 개정에 관한 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사료철 [AUS004_108_00C0023]은 주한 미 대사관 측에서 미8군-주한유엔군사령부에 공유한 원조협정 초안과 이에 대한 매그루더 사령관의 비판과 제안사항이 담겨 있다. 군의 입장에서 1961년 원조협정 개정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5.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사료 목록
1) GEN Magruder, Jan-Jun 1961 (Conf.) [사료철 AUS004_108_00C0023]
2) Agreements Jan. 1961 [사료철 AUS056_08_00C0009]
3) RG 84,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61, Entry CGR 56-63, Box 29, 500: MSP Program, 1961 [사료철 AUS003_06_02C0111]
4) RG 84,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60, Entry: CGR 56-63, Box No. 21, 500: Mutual Security Program, 1960; USOM [사료철 AUS003_06_02C0126]
5) RG 469, Office of the Deputy Director for Operations(1953-61),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Entry 422, Korea Subject Files, 1953-59, 1960-61, Agreements: Bilateral-Committee: OCB, Box 138, Agreements-Bilateral [사료철 AUS014_35_00C0662]
6) RG 469, Office of the Deputy Director for Operations(1953-61),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Entry 422, Korea Subject Files, 1953-59, 1960-61, Agreements: Bilateral-Committee: OCB, Box 138, Agreements-Bilateral [사료철 AUS014_35_00C0662]
6. 참고문헌
박태균, 『원형과 변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이현진, 『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1948-1960』, 혜안, 2009.
국가기록원, 『주요정책기록해설집 1권 경제 편 : 원조와 경제개발』, 국가기록원, 2014.
도널드 스턴 맥도널드, 『한미관계 20년사, 1945-1965년』, 한울아카데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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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이휘현(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