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외국인 민간원조단체의 두 얼굴 : 긴급구호와 심리전 사이에서

외국인 민간원조단체의 두 얼굴 : 긴급구호와 심리전 사이에서

 

1. 들어가며

 

냉전시대 미국은 전 세계 여러 국가를 대상으로 대규모 군사·경제원조를 공여했다. 미국은 대외원조 사업을 냉전을 수행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강력한 미군을 통한 물리적 강제력 행사는 냉전시대 미국이 선호하는 외교 형태는 아니었다. 그보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원조사업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주조하고자 했다. 미국의 원조사업은 결코 무상의, 시혜적인 성격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의 원조사업은 철저하게 미국의 안보를 위한 세계 전략의 틀 안에서 방향과 내용이 결정되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대적인 원조 역시 한국을 위해 그저 베푼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전략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원조사업에는 미국 정부와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민간구호단체들이 참여했었다는 점이다. 외국의 민간원조단체, 특히 종교계는 6·25전쟁 이전부터도 한국에서 다양한 구호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케아(C.A.R.E ; the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Everywhere, Inc.)는 냉전시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적인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거대한 인도주의 단체이다. 케아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식량 패키지, 우유 급식 사업, 난민정착 사업 등 여러 원조 사업을 한국에서 수행해왔다. 특히 케아는 미 원조당국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사업을 시행해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민간구호단체이다. 여기에서는 케아를 중심으로 외국민간구호단체가 시행한 원조 사업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려 한다.

 

2. 주한 케아(CARE)의 민간구호 사업

 

한미동맹의 결속력은 단순히 한국전쟁의 파병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다수 한국인에게 미국은 고아, 가난, 질병 등의 문제를 해결해줬던 국가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의 대한원조는 정치, 경제적 측면이나 원조 규모만큼 외국 민간원조단체 중심의 문화적 측면도 중요하다. 냉전시대 민간구호단체의 구호·원조 활동은 가난한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구호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외국민간원조단체는 주로 종교계, 사회복지계 단체에서 운영했고, 활동의 중심에는 미 국무부와 원조당국이 있었다. 따라서 민간구호단체의 활동을 단순히 민간에 대한 구호, 시혜적 차원에서 바라봐선 안 된다. 구호단체 활동을 지원한 그 배경과 사업의 구조, 그 사업이 낳은 효과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케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여러 민간 단체들이 모여 설립된 거대 민간구호단체이다. 케아는 ‘케아 패키지(C.A.R.E. Pakage)’라는 구호물품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유럽에 대한 긴급구호 사업이 종료된 이후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시선을 돌려 일본과 한국 등의 지역에서 구호 사업을 전개하였다. 케아는 1948년 한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하여 사업을 개시하였으나, 6·25전쟁 발발로 인해 잠정 중단하였다가 전쟁 중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관리 하에 다시 사업을 재개하였다. 이후 주한케아는 1979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우유급식사업, 식량패키지 보급, 자유마을 프로젝트 등 다양하면서도 중요한 구호 사업을 시행하였다.

1950년대 중반이후 주한케아는 주한유엔군사령부와 경제조정관실(OEC), 원조당국(ICA)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한국에 진출한 민간구호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사업들을 맡아서 진행하였다. 식량, 의복, 의료, 농촌재건, 교육 등의 원조사업에서 주한케아는 다른 민간단체와 비교했을 때도 눈에 띄는 비중을 차지하였다. 주한케아의 한국 활동은 대한원조를 주관하는 주한경제조정관실, 한국정부와 ‘용역’ 계약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그 물적 토대는 미국 농무부의 지원에 기반하였다. 케아 소속 중요 인물들은 케아에서의 활동 후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에 재취업하기도 했다. 따라서 케아의 한국 사업은 그 배경이나 방향성 면에서 냉전시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

주한케아의 사업 중 냉전과 관련되어 주목할만한 특징적인 사업 두 가지를 뽑으라면, 푸드 크루세이드와 자조마을 지원 사업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푸드 크루세이드는 크루세이드(Crusade; 십자군)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진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우방을 위한 원조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이 사업은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 미 원조당국과 농무부의 지원 하에 식량 지원을 하는 것으로서, 인도주의적인 구호뿐만 아니라, 강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사업이었다. 또한 자조마을 지원 사업은, '자유마을'을 건립해 난민 또는 가난한 이들을 정착시켜 '자조'(self-help) 정신을 바탕으로 자유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때 '자조'라는 가치는 냉전시대 미국이 공산주의 진영의 인민과 구별되는 미국 '시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신으로 강조되었고, 냉전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원조를 담당했던 주한 케아의 담당자 조지 벤트(George R. Bent Ⅱ)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케아가 진행했던 구호 사업들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은 물질적인 지원에 있지 않고, 정치적인 곳에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서구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자유 진영의 친구들에게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이처럼 푸드 크루세이드 사업을 포함한 주한 케아의 민간구호사업은 단순히 가난한 대중, 난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데만 있지 않았다. 민간구호단체의 인도주의적인 구호와 상징은 냉전시대 자유 진영의 결속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이는 구호를 지도하는 미국의 문화·경제적 우월성을 선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민간구호단체의 인도주의는 냉전시대 치열한 전쟁 수단 중 하나였던 것이다.

 

3. 수집사료 소개

 

1) 한국전쟁 기간 중 케아(CARE) 구호물품 박스를 둘러싸고 있는 부산 경남보육원 고아들 사진 (1952. 03. 06.)

 

참조코드제목생산일자
AUS005_06_04V0000_661Youngsters of the Kyong Nam Bo Yuk Won Orphanage, Pusan. Crowd around1952-03-06
1952년 3월 6일 미국 여성클럽중앙연맹(Central Federation of Womens Clubs of the United States)에서 보내온 케아(CARE) 구호물품을 부산에 위치한 경남보육원 고아들이 받고, 이를 기념하여 케아 상자를 앞에 두고 촬영한 사진이다. 구호물품 상자의 총선적량은 21,139였고, 이 물품들은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감독 아래 배분되었다.

 

2) 대한민국 보건사회부와 케아(CARE) 간에 체결된 우유급식 관련 계약서 (1957. 06. 01.)

 

참조코드제목생산일자
AUS014_79_00C0007

Contract between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Cooperation for American Remittances to Everywhere, Inc.

(사료철 727 CARE Contract 1958 thru 내 278~295쪽)

1957-06-01
   

이 자료는 1957년 6월 1일 보건사회부와 케아 간에 체결된 계약서이다. 이 계약서는 우유급식과 관련해서 주한케아의 역할과 권한을 명시하고 있다. 우유급식 사업은 1950년대 중후반 주한케아에서 시행했던 가장 중요한 사업일 뿐만 아니라, 우유급식 사업을 둘러싼 주한케아와 유관 부서간 갈등은 냉전시대 민간구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줄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우유급식 사업은 1950년대 이후 유엔 산하기구들이 구호사업의 차원에서 오랜 기간 시행한 대표적인 구호사업이다. 우유란 식품은 영양학적 관점에서 제3세계 아동들의 영양상태를 개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구호라는 목적에 적합한 식품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부터 우유급식사업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민간구호단체들이 활용할 수 있었던 미국 잉여농산물 중 (고체) 우유가 유통기한이 긴 (고체) 우유가 활용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유급식 사업은 초기 단계부터 미국 정부의 원조사업과 깊은 연관 속에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반이후 한국에서의 구호 활동을 확장해나가던 주한케아는 끊임없이 한국에서 자신들이 진행하는 사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미국정부, 주한미군, 한국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한케아의 생각과 달리, 미국 정부는 우유급식사업을 유니세프를 통해 진행하고자 하는 복안을 구상하였다. 이에 주한케아는 유니세프가 도입할 막대한 잉여농산물이 한국내 모든 자선사업을 흡수할 것을 경계했다. 이에 주한케아는 끊임없이 한국내 원조사업을 관장하는 주한경제조정관실과 한국정부, 미 농부우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우유급식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1957년 6월 1일 주한케아와 보건사회부와의 계약서는 우유급식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주한케아가 바친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약은 주한케아에게 다양한 권한을 보장해주었는데, 계약의 세부조항들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장 2항을 살펴보면, 주한케아는 2년간 미 농무부로부터 4천만 파운드의 탈지유 기부를 얻을 것을 보장 받았다. 4항에서는 조달청에 물품이 넘어간 후, 최종수령될 때까지 그 타이틀은 케아(C.A.R.E.)로 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5항인데, 5항에서 케아는 분유의 수령, 저장, 운송, 유지, 재배정, 배정, 처분을 보건사회부와 케아가 담당할 것이 명시되었다. 즉, 주한케아는 민간원조를 위해 들어오는 미국 잉여농산물의 운송망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계약서는 주한케아가 한국에서 구호사업을 전개하면서 단순히 '시혜' 차원이 아니라, '비즈니스'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한케아는 미국정부, 한국정부, 유관기관과의 관계를 통해서 단체의 한국 내 활동을 보장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한케아의 사업 방식과 성격은 주한케아에게 영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미국 정부의 냉전정책에 복무해야 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후 자료를 통해 소개할 주한케아의 다양한 '자조(self-help)' 프로그램 중 난민정착 사업, 자유의 마을 건설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3) 한국에서의 '자조' 프로젝트를 위한 케아(CARE) 원조 (1959. 06. 05.)

 

참조코드제목생산일자
AUS014_35_00C0427

CARE Assistance to Self-Help Projects in Korea

(사료철 Relief(CARE) 내 46~50쪽)
1959-06-05

이 자료는 1959년 6월 15일 미국의 원조기관인 국제협조처(ICA)에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케아에서 한국에서 진행한 '자조' 프로젝트의 현황을 보고한 것이다.

한국에서 진행된 자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케아는 153명의 난민을 포함하여 약 2만 명의 농어촌 인구를 위한 지원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보고서는 이 프로그램이 아주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주한케아의 책임자인 테일러는 약 만 2천 명에서 만 4천 명의 가족들이 자조 난민 프로젝트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하였고, 약 만 2천 명은 이전보다는 적은 원조만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현재 케어는 새로운 정착 프로젝트를 실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테일러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케아는 다양한 도구와 장비, 가축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노력하는 자들을 도우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구는 케아의 정착 프로그램, '자조 마을(self-help viliage)' 프로젝트가 명확히 '자조' 정신을 한국에 전파하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오랜 속담처럼 자조의 개념이 한국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냉전시대 미국은 의도적으로 '자조'를 자유진영의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공산주의 진영의 가치, 공산사회,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개념에 맞서,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자에게 그만큼의 결과가 따르는 것, 기회의 평등과 그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미국은 꾸준히 강조했다. 원조사업을 실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원조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내세운 자유주의 이념을 내재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자조'하는 집단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 지점에서 민간구호단체의 원조사업들이 냉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주한케아에서는 직업 훈련도 지원하였다. 케아는 한국의 고아원에서 나간 이들과 난민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업 교육을 통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주한케아는 고아원과 복지시설에서 목수 양성, 신발 제작, 전기설비 관련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 장비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교육들은 긴급구호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사업의 방향성이 미국 대외원조정책의 큰 틀 안에서 결정되고 시행되었다는 점은 민간구호사업의 성격을 파악할 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4)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난민정착 프로젝트 (1959. 06. 10.) 

 

참조코드제목생산일자
AUS014_79_00C0010

Yoju Nungso Assimilation Project(Befor and After)

(사료철 CARE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to Everywhere] 내 4~10쪽)
1959-06-10
   

이 자료는 1959년 6월 10일 주한케아에서 뉴욕의 주한케아 본부에 보낸 난민정착 프로젝트에 관한 보고서이다.

1955년 봄 주한케아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첫 번째 난민정착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4년이 지난 지금 이 프로젝트는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고 보고서는 말하고 있다. 이에 관해 보고하면서, 보고자는 만약 이 보고서를 읽게 되면,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보고서가 사업의 시행자인 케아의 입장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6·25전쟁 이후 피난민이 다수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연백 출신 217가구는 여주 능서면에 정착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제공하였고, 피난민들은 스스로 주어진 토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토지가 너무 척박하여 경작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주 능서리 지역의 난민정착사업에 1955년 주한케아가 참여하였다. 주한케아는 먼저 농기구를 제공하였고, 식량과 의복을 지원하였다. 또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을 수 있도록 시멘트 등의 건설자재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한케아는 이들을 위한 지원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토지 개간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가축을 키우는 것도 함께 고려하였고, 이에 본부에 신청하자 본부는 오하이오 여성지부를 통해 아기돼지 100마리를 살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였다. 보고서는 피난민들이 스스로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주한케아는 단순히 시혜적 지원이 아니라, 난민들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자조'를 위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4년이 지난 지금은 쌀과 고추, 고구마 등의 곡물생산이 이전에 비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여주군 능서면의 피난민 정착사업은 주한케아가 진행한 수많은 난민정착 사업 중 한 가지이다. 주한케아는 1950년대 다수의 난민 정착사업들을 시행하였고, 식량과 의복 지원뿐만 아니라, 생산을 위한 환경, 노동을 위한 조건을 함께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능서면 정착사업은 케아의 피난민 정착사업 추진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참고할 수 있다.

 

5) 1960년 1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케아(CARE)의 급식사업 관련 보고서

 

참조코드제목생산연도
AUS014_35_00C0513

CARE Report on Feeding Program for Period Beginning January 1, 1960 and Ending on June 30, 1960

(사료철 내 83~102쪽)

1960

이 자료는 1960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진행된 케아의 급식사업에 관한 보고서이다. 1960년 하반기에 작성된 문서로 생각된다. 이 문서는 전반적인 내용, 계약사항, 옥수수 배급, 인원, 재정, 현장 감독, 사업 진행, 다음 프로그램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케아의 급식사업 전반을 파악하기에 좋은 사료이다.

케아는 한국 정부와의 ‘용역’ 계약을 통해 급식사업을 진행하였다. 결식아동과 난민을 위한 급식 사업은 케아가 1950년대 후반 진행한 구호사업 중 하나였다. 케아의 구호를 위한 급식은 분유와 옥수수가루를 통해 제공되었다. 옥수수가루의 경우, 배급을 받아 죽을 끓여먹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1962년도 급식사업 진행상황을 살펴보면, 서울시내 약 36만여명의 초등학생들 중 20개교 2만 5천 명의 학생들이 케아에서 지원한 분유와 옥수수가루로 만든 죽을 통해 점심을 해결한 사실이 확인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케아는 한국정부와 꾸준히 계약을 체결하면서 급식사업을 계속해나갔다. 케아는 단순히 급식만 제공한 것이 아니고, 실제 현장에서의 진행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책임자들을 지방에 꾸준히 보내서 상황을 체크하였다. 제공한 구호품이 아이들과 난민에게 실제로 제공이 되고 있는지, 그 상황에서 케아의 취지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에서 체류한 일정을 살펴보면, 1~2일이 아니라, 일주일에서 10일 정도 머무르는 경우도 있어, 꽤 자세하게 상황을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 보고서에서는 급식사업 책임자들을 파견하여 어떠한 점들을 위주로 조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6) 케아(CARE)의 옥수수가루 할당 (1961. 02. 06.)

 

참조코드제목생산일자
AUS014_79_00C0009

Allocation of CARE Cornmeal

(사료철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to Everywhere (CARE) in Korea 내 105~116쪽)

1960-02-06

이 자료는 사료건 제목 그대로 주한케아에서 제공한 옥수수가루의 지원현황에 관해 보고한 것이다. 

이 자료에는 주한케아와 한국 보건사회부 간에 케아의 옥수수가루 급식에 관한 계약사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난민 정착지를 대상으로 한 급식·식량지원 사업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지역과 정착지 대표, 가구수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기준으로 식량을 제공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령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의촌리의 난민정착지의 대표는 이광열 씨였으며, 이 마을의 가구수는 30명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케아는 가구수에 맞추어 30포대(bag)의 옥수수가루를 지원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주한케아가 급식사업을 통해 지원하는 정착지의 위치와 대표자의 이름, 가구수가 조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흥미로운 것은 정착지가 전국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난민’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1950~60년대 한국사회 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과 거리가 꽤 있다고 볼 수 있는 충청남도 당진군 지역에도 합덕읍과 우강면에 합덕난민정착지, 송산난민정착지가 위치해 있었고, 두 곳 합하여 388가구, 약 1,600명이 살고 있었다. 이 자료는 전후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난민’이 존재하였고 이를 한국사회의 ‘정상’ 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외부 민간구호단체의 지원과 한국정부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외국민간원조단체(주한케아) 관련 수집사료 현황 및 이력

 

외국민간구호단체, 그 중에서도 주한케아(C.A.R.E.)에 관한 자료는 미국 대외원조기관 문서군인 RG469와 RG286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미 국제개발처(USAID) 설치를 기점으로 그보다 앞선 시기의 국제협조처(ICA) 자료는 RG469문서군에, 미 국제개발처(AID) 자료는 RG286문서군으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주한케아의 시기별 활동은 각각의 문서군에서 찾아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중에서도 1950년대 주한케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서비스하고 있다. RG469문서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한케아 자료들을 통해 주한케아의 주요 활동이었던 ‘자유마을’ 사업, 난민정착사업, 우유급식사업, 식량 물품 지원 사업등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할 수있다. 예를 들어, 사료철 [AUS014_79_00C0009]은 구호 관련 서한, 보고서, 비망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자료들은 식량 배급 계획, 지역, 학교별 옥수수 가루 배급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이후 주한케아의 활동 자료는 RG286 문서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50년대보다는 자료가 적은 편이긴 하나, 잉여농산물 원조 관련 사업과 난민정착사업에서 꾸준히 주한케아가 언급되고 있다. RG286 문서군의 사료계열 [AUS056_08]와 [AUS056_09]에서 잉여농산물 원조 또는 민간구호 활동 부분에 주한케아에 관한 자료가 담겨 있다. 특히 ‘평화를 위한 식량(PL480)’ 원조와 관련해서는 사료철 “Commodities-Agricultural Surplus Jan. 1961”[AUS056_08_00C0022]에서 미공법 480호 3관에 관한 논의, 잉여농산물의 활용 방안과 주한케아의 활동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주한케아에 관한 자료와 함께 확인되는 미 원조당국의 문서들을 통해 민간구호단체인 주한케아의 활동이 미 원조기관과의 긴밀한 협의와 지도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 주한케아 관련 국사편찬위원회 수집사료 목록

 

1) RG 469, Office of the Deputy Director for Operations(1953-61),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Entry 422, Korea Subject Files, 1953-59,1958-59, Publication 1959 Reports: Bloomfield, Box 130, Refugees; Relief; Relief(CARE); Relief-Voluntary Agencies; Reports ; Reports-Annual; Reports-Bloomfield [사료철 AUS014_35_00C0427]

 

2) RG 469, Office of the Deputy Director for Operations (1953-1961),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Entry 422, Korea Subject Files, 1950-61, 1960-61, Publication-Relief: School Lunches, Box 169, Public Works; Relief-Care; Publications; Relief-School Lunches [사료철 AUS014_35_00C0513]

 

3) 727 CARE Contract 1958 thru [사료철 AUS014_79_00C0007]

 

4)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to Everywhere (CARE) in Korea [사료철 AUS014_79_00C0009]

 

5) CARE [Cooperative for American Relief to Everywhere] [사료철 AUS014_79_00C0010]

 

6) Commodities-Agricultural Surplus Jan. 1961 [사료철 AUS056_08_00C0022]

 

 

6. 참고문헌

 

한봉석, 「구호물자에 담긴 냉전 : 주한 케아(C.A.R.E.)의 패키지로 살펴보는 냉전과 인도주의」, 『통일과 평화』12권1호, 2020.
한봉석, 「인도주의 구호의 ‘냉전적 기원’ - 1950년대 주한 케아(C.A.R.E.)의 우유급식 사업과 ‘푸드 크루세이드’(Food Crusade) -」, 『사이』28, 2020.
이소라, 「1952-55년 한미재단의 활동과 역사적 성격」, 『한국사론』62, 2016.
김아람, 『한국의 난민 발생과 농촌정착사업』,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집필 : 이휘현(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원)